한줄 詩

세월이 간다 - 박두규

마루안 2016. 1. 5. 00:50



세월이 간다 - 박두규



내 서성이던 젊은 날의 배경은 늘 해가 저물고 쉽게 어둠에 젖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강가의 느릅나무 한 그루와 그 눈물과 눈물을 정제하던 바람소리가 있었다. 세월은 그 어딘가에 책갈피처럼 끼워져 말라 갔다.


아직도 내 안에는 정처 없는 어둠들이 가득하고 그 어둠을 떠도는 꽃그늘 하나 있다. 세월을 칭칭 감고 끝내 함께 가는 꽃도 없는 꽃그늘이다. 꽃도 잎도 다 날려 보낸 텅 빈 나무 한 그루가 만들어 내는 꽃그늘의 기억이다.


그렇게 이루지 못한 사랑 하나가 그림자처럼 떠돌고, 귓가에는 늘 어둠에 젖은 바람소리가 가득 고였다. 어느 험한 도량에 들어야 이 절망 하나가 떨어져 나갈까. 사랑은 더디게라도 오기는 오는 것일까.


세월은 가고 눈 덮인 벌판에 서서 노래를 부른다. 이제는 아무도 아무 것도 보낼 것 없는 메마른 별리의 노래를 부른다. 상심도  없이 넋도 없이 한 치의 그리움도 없이 막무가내로 세월이 간다.

 


*박두규 시집, 숲에 들다, 애지


 






달이 뜨니 달이 뜬다고 할뿐이다 - 박두규


 
강가에 앉아 달이 뜨기를 기다린다
누구를, 무엇을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보낸
허접한 세월의 어디쯤에서
달맞이꽃 하나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저 강물처럼 매일 나를 흘렀을 것이나
나는 스스로 어두워 너무 어두워
보지 못하고 나를 어둡게 했다


미안하다. 흘러가버린 세월이여
이제는 달이 뜨면 분명하게
달이 뜬다고 말하겠다

 

 



# 구구절절 심금을 울리는 시인의 절창에 그저 반복해서 시를 읽을 따름,, 그 어떤 사족도 시에 몰입하는데 방해만 될뿐,, 시집에 붙은 시인의 말로 대신한다. 이것이 시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아부다.

 

오십 수에 발을 디디던 어느 날
끌고 다니던 절망 하나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內臟(내장)의 각 부위를 고르게 칼질하는 일이었고
켜켜이 쌓인 세월과 감정의 퇴적을 도려내는 일이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도려낼수록 세상이 먼저 야위어 갔다.
그러던 어느날 세속의 한 스승이 말했다.
시나 예술의 경지도 결국은 不一不二의 숲에 이르는 것이라고.
순간, 이 길을 다 걸어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세상에서도 나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