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 - 박남희

마루안 2014. 8. 23. 19:05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 - 박남희



나는 어느 날
당신이 말하는 것이 허공을 말하는 것 같아
당신이 문득 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지

 

꽃은 자신이 허공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
자신의 안에 허공이 있다는 것도

 

하지만 뿌리는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을 알고 있지
그런데 한차례 꽃이 피어나고 시드는 허공의 이치를
뿌리는 왜 끝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면서 실뿌리는 점점 땅 속 깊이 뻗어가
낯선 돌을 만지고 샘을 더듬다가
어둠의 차디찬 깊이를 만나고 끝내 꽃을 떨구게 되지

 

아름다움은 모두 한차례의 흔들림으로 기억되는 것인지
허공은 자꾸만 꽃을 흔들고 꽃은 점점 외로워지지
그렇게 꽃은 떨어져 시들어가지

 

꽃이 외롭게 흔들리다가 만들어낸 흔적이
다시 허공이 된다는 것을 바람은 알고 있지
그렇게 만들어진 텅 빈 커다란 꽃이 허공이라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주는 이가 없어도
허공은 텅 빈 꽃으로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지

 

당신과 내가 마주 보며 흔들려서 만들어낸
바람의 빛깔, 저 허공의 언어가
꽃이라는 것은 영원히 당신과 나만이 알지

 


*시집, 고장 난 아침, 애지출판

 

 






눈물 - 박남희



고이는 것과 흘러가는 것 사이에 내가 있다
나는 그동안 버려야 할 것들을 너무 많이 데리고 살았다
고여 있다는 것은 흘러가고 싶다는 것이고
흘러간다는 것은 고이고 싶다는 것인 줄도 모르고
나는 그동안 때 없이 고이고 때 없이 흘러가고자 했다
그리하여 나는 어느새 자꾸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옛 웅덩이에 고여 있던 하늘을 우러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면 하늘은 금세 흐려져 오래 고여 있던 것들을
지상으로 흘려보냈다 태고 적 나를 흘려보냈다
그렇게 하늘은 태고 적 나와 지금의 나를 만나게 해주었다
수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 내가 거쳐했던 수많은 집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집들을 함부로 아비라 어미라 부를 수 없다
집은 다만 무언가를 담고 흘려보내는 것일 뿐
고이는 것과 흘러가는 것 사이에 내가 있다






# 박남희 시인은 경기 고양 출생으로 숭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폐차장 근처>, <이불 속의 쥐>, <고장 난 아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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