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벚꽃 핀 술잔 - 함성호

마루안 2014. 8. 4. 23:50



벚꽃 핀 술잔 - 함성호

 

마셔, 너 같은 년 처음 봐
이년아 치마 좀 내리고, 말끝마다
그렇지 않아요? 라는 말 좀 그만 해
내가 왜 화대 내고 네년 시중을 들어야 하는지
나도 한시름 덜려고 와서는 이게 무슨 봉변이야
미친년
나도 생이 슬퍼서 우는 놈이야
니가 작분지 내가 작부인지
술이나 쳐봐, 아까부터 자꾸 흐드러진 꽃잎만 술잔에 그득해
귀찮아 죽겠어, 입가에 묻은 꽃잎이나 털고 말해
아무 아픔도 없이 우리 그냥 위만 버렸으면
꽃 다 지면 툭툭 털고 일어나게
니는 니가 좀 따라 마셔
잔 비면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지 말고
술보다 독한 게 인생이라고?
뽕짝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술이나 쳐
또 봄이잖니



*시집, 너무 아름다운 병, 문학과지성

 






 
불, 검게 사무치는 - 함성호

 
 
잡년아, 울지마라
웃지마라, 미련한 것
마른지풀 같은 니 머리칼에 흰 꽃가루가 하염이 없고
니는 그만 눈을 감는구나 나는 잠 속에서 긴 꿈을 꾼다 잡년아


무사해라 부디,
검붉은 숯불처럼 사그리 타 들어가는 니
뜨거운 살집이 이 시리게 그리웁고
해저의 심연에서 물안개에 갇힌 니 모습 이젠 보이지 않는다
시원스럽게 토해내지도 못한 채 분해되지 않는 화학주처럼
피가 나게 긁어도 시원치 않은 게 사랑이다 잡년아


잡년아, 니가 가는 먼 길은
겨울바닷가 초저녁의 불투명한 호박색으로 저물어가고
확확, 나는 목이 타고 눈에는 불이 일어
니 떠나고 난 자리에 날개 터는 소리만
(푸드득) 불꽃 피어 푸른 밤으로 솟구치더라


잡년아, 타오르는 불의 중심처럼 사무치는 고온이면서도
뜨겁지 않은 게 사랑이다
이, 잡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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