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 하다 - 정호승

마루안 2013. 1. 20. 02:22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 하다 - 정호승



젊을 때는 산을 바라보고 나이가 들면 사막을 바라보라
더이상 슬픈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과거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웃으면서 걸어가라
인생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오늘을 어머니를 땅에 묻은 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첫아기에게 첫젖을 물린 날이라고 생각하라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분노하지 말고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침밥을 준비하라
어떤 이의 운명 앞에서는 신도 어안이 벙벙해질 때가 있다
내가 마시지 않으면 안되는 잔이 있으면 내가 마셔라
꽃의 향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듯
바람이 나와 함께 잠들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일 뿐
내가 누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 되어야 한다
오늘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무엇을 이루려고 뛰어가지 마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지 말고 가끔 저녁에 술이나 한잔해라
산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을 내려와야 하고
사막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깊은 우물이 되어야 한다



*정호승 시집, 포옹, 창비








북극성 - 정호승



신발 끈도 매지 않고
나는 평생 어디를 다녀온 것일까
도대체 누구를 만나고 돌아와 황급히 신발을 벗는 것일까
길 떠나기 전에 신발이 먼저 닳아버린 줄도 모르고
길 떠나기 전에 신발이 먼저 울어버린 줄도 모르고
나 이제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와
늙은 신발을 벗고 마루에 걸터앉는다
아들아, 섬 기슭을 향해 힘차게 달려오던 파도가 스러졌다고 해서
바다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들아, 비를 피하기 위해 어느 집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비가 그친 것은 아니다
불 꺼진 안방에서
간간이 미소 띠며 들려오는 어머니 말씀
밥 짓는 저녁연기처럼 홀로 밤하늘 속으로 걸어가시는데
나는 그동안 신발 끈도 매지 않고 황급히 어디를 다녀온 것일까
도대체 누구를 만나고 돌아와
저 멀리
북극성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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