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손가락 끝에 박힌 눈 - 손병걸

마루안 2013. 1. 16. 04:39



손가락 끝에 박힌 눈 - 손병걸



깨진 유리컵에 베인 손가락
점자책을 더듬을 때 아파서
며칠째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못한
내 손가락 끝에 박힌 눈


본 적 있다 이맘때쯤, 그 봄날
베인 상처를 파고드는 소독약에
자르르 퍼지는 통증처럼
한나절 봄비 내린 후
대지에 돋아나던 새싹들
그 푸른빛의 살점들


떠오르는 햇볕 한 줌이라도 더
부서지는 저녁놀 한 줌이라도 더
동공 속에 담으려다가 끝내는
두 눈처럼 꽉 닫혀버린 창문 밖
저 나뭇가지에 앉아 재잘대는 새들처럼
저마다 소리 내고 만져지는 건
그만큼 통증을 삼킨 상처다


거기서 솟아오른 살점들이다



*시집,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애지








개봉역에서 - 손병걸



십여 년 전, 개봉역
출근 바쁜 사람들 속에서
내 두 눈은 서서히 닫혀갔다


복잡한 역곽장, 개봉약국
원기회복제 맛은 여전하고
약국 문을 밀고 나서니
오 분마다 만원 버스
십이월 한풍 속을 향한다


이내 전철이 멈춘 개봉역 플렛폼
쏟아진 발소리 뒤엉키고
꽉 막혀버린 삶이 견딜 수 없을 때
수시로 개봉開封을 떠올렸던 것처럼
저 틈 속에서도 누군가는
찬란한 개봉을 생각하는가


소멸한 빛이 던지는 소리 따라
열린다, 보이므로 간과했던 감각들
내딛는 발걸음마다
속속들이 환해지는 땀구멍만큼





# 손병걸 시인은 앞을 볼 수 없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실명 증상은 1997년 예고 없이 찾아왔다. 결혼한 지 4년째이던 서른 즈음 예고 없이 찾아온 불행,, 누구에게나 감당할 만큼만 불행이 찾아온다지만 실명은 가혹한 불행이다. 군복무 시절 힘든 훈련의 후유증 때문에 발병한 관절염과 척추디스크가 피를 탁하게 하는 혈관염으로 번졌다. 탁해진 피는 가장 미세한 시신경을 손상시키면서 급기야 실명까지 왔던 것이다. 삶의 끈을 놓으려는 몇 번의 자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점자를 익혀 시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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