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추억에 대한 경멸 - 기형도

마루안 2012. 12. 30. 06:17

 

 

추억에 대한 경멸 - 기형도

 


손님이 돌아가자 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어슴푸레한 겨울 저녁, 집 밖을 찬바람이 떠다닌다
유리창의 얼음을 뜯어내다 말고, 사내는 주저앉는다
아아, 오늘은 유쾌한 하루였다, 자신의 나지막한 탄식에
사내는 걷잡을 수 없이 불쾌해진다, 저 성가신 고양이
그는 불을 켜기 위해 방안을 가로질러야 한다
나무토막 같은 팔을 쳐들면서 사내는, 방이 너무 크다
왜냐하면, 하고 중얼거린다, 나에게도 추억거리는 많다
아무도 내가 살아온 내용에 간섭하면 안 된다
몇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사내가 한숨을 쉰다
이건 여인숙과 다를 바 없구나, 모자라도 뒤집어 쓸까
어쩌다가 이 , 책임질 밤과 대낮들이 아직 얼마인가
사내는 머리를 끄덕인다, 가스 레인지는 차갑게 식어 있다
그렇다, 이런 밤은 저 게으른 사내에게 너무 가혹하다
내가 차라리 늙은이였다면! 그는 사진첩을 내동댕이친다
추억은 이상하게 중단된다, 그의 커다란 슬리퍼가 벗겨진다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고양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독한 술을 쏟아붓는, 저 헐떡이는, 사내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그집 앞 - 기형도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 남들이 뭐라 하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방적인 사랑이란 성립할 수 없는 것, 그 사랑이 떠나가거나 아님 옆에 두고 몰래 짝사랑을 하거나,, 시인의 애틋하고 처절한 사랑 방정식은 영영 풀 수 없는 것이었을까. 누가 대신 풀어줄 수 없는 사랑이 그렇게 힘든 것인 줄 미처 몰랐을 거다. 하긴 알았던들 상처 받기는 매한가지였을 테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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