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탱자나무 - 정원도

마루안 2019. 6. 27. 19:15



탱자나무 - 정원도



배고프던 날 튀밥 같이 하얀 꽃
탱자나무 울타리들이
늙은 군인처럼 완고한 성벽이 되어
볼 붉은 능금을 지켰다


동네 아낙들이 줄줄이 늙은 나무 등걸에 기어올라
가난한 밥을 따다가 돌아오는 저녁이면
벗은 머리 수건과
온 몸에 사과 익는 냄새가 방안 가득 번졌다


탱자나무 울타리 뚫고
철 지난 사과 이삭 주우러 가던 날은
무서움이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려와
생채기 난 손등 몰래 감추며 돌아왔다


몽고의 침입 막으려고
강화성 주변에 심었다는 그 파수꾼 가시 따서
동네 아지매들 우루루 살평상에 둘러 앉아
걸터앉은 해거름의 노을도
다슬기 함께 빼먹으며 붉게 저물었다



*시집, 마부, 실천문학사








오구굿 - 정원도



초저녁부터 종이꽃 종이배를 만들고
벽에는 극락왕생도 가위로 오려 붙이고
어쩌다가 집안에 황천 못 간 조상 있어
우환이 덮친다고
어려운 살림 쪼개어 굿판을 벌인다


살아서 어지간히
자식보다 조랑말을 더 아끼더니
마부들끼리 지친 술동무나 하다가 떠나셨는가!
말도 마차도 사라지고 없는 마을에
탁배기 한 잔 못 잊어 어느 해거름에 다시 돌아와
들녘을 지나가는 바람이 되었는가!


초저녁부터 동네 아낙들
한마당 가득 메우고 앉아
입방아 혀 끌끌 차며 추수 끝
피곤을 묻었다
무당의 구슬픈 소리 신들린 춤 한바탕에
가슴 에이는 징소리 쌀 튀기는 북소리
달은 참 무던히도 밝아서
신대를 잡은 대-잡이 큰어머니가
까무러치던 밥이었네






#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고 나서 단 한 장면의 영상이나 한 줄의 의미 있는 대사만 건져도 본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 시도 그렇다. <배고프던 날 튀밥 같이 하얀 꽃>은 궁핍한 시대를 건넌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구이고 <탁배기 한 잔 못 잊어 어느 해거름에 다시 돌아와 들녘을 지나가는 바람이 되었는가>는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사무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문장이다. 디지털 시대인 요즘이야 이런 시가 잘 안 읽힐 테지만 나는 이런 시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