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거나 한심하거나 - 조항록
돌베개 베고 잠들어 물렁한 꿈을 꾸었네
빈 그릇을 핥는 식욕이 버리지 못하는 열망이었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면 소금이 버석거렸네
절반을 지나왔나 한숨 돌리면 나머지 절반에 어스름이 스몄네
당신에게 다가서면 당신의 뒷모습이 보였네
아무렇지 않게 꽃 모가지를 꺾는 사람들이 향기를 다 가져갔네
경계마다 장벽을 쌓아 외로움이 나쁜 버릇처럼 몸에 뱄네
마음을 얹어둔 시렁에는 거미줄이 어지러웠네
숨죽여 넓디넓은 우주의 당부를 들으려는데 자꾸 옆구리가 간지러웠네
그믐이면 지붕을 인 것들 굽어보며 인적 없는 벤치에 머무르기도 했네
여기서 저기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네
달빛이 머뭇거렸네
밤이 참 무거웠네
*시집, 눈 한번 감았다 뜰까, 문학수첩
공연히 - 조항록
한 줄의 생몰 연도로 기록될 족보의 나는
허공의 사생아가 되고 싶었다
너무 늦지 않게
순응의 명부에 오르지 않으려 몸부림을 쳤다
그대로 어렴풋하게 막연한 의미가 되고 싶었으므로
불필요한 것을 생략한 한 움큼의 이력이 되고 싶었으므로
빈손이 무거웠으나
나의 편이 아닌 네가 날카로워 덜컥 선잠을 깨고는 했으나
순장(殉葬)이 단지 죽음의 일만은 아니어서
산 사람들이 한데 모여 안부를 나누고 회비를 걷으며
기꺼이 보폭을 낮추기도 했으나
어디든 명부에 이름 석 자 올리는 삶을 원하지 않았다
새로 이사 와 입주자명부에 이름을 적으며
유목민이 되지 못하는 나약한 종아리가
공연히 혼자 가는 먼 길을 새기며
# 시집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시인이다. 막연하게 내년쯤 시집을 내겠구나 생각했는데 조금 일찍 만나 반가웠다. 시인의 시집 내는 주기도 아주 적당하다. 내가 오랜 시 읽기에서 발견하고 정한 것인데 속칭 올림픽 주기라고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4년 터울로 시집을 내는 것이다. 앞뒤로 6개월이나 일년쯤 당기거나 늦추는 것이야 숙성을 위해 필요하다. 당분간 이 시집은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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