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싸움 - 김요일
달빛이 가르쳐준 길을 따라
당신을 안고 붉은 밤을 건너면,
곱디곱다는 화전(花田)엘 갈 수 있나요?
화전(花田)엘 가면
노랗고 파란 꽃그늘 아래 누워
지독히도 달콤한 암내 맡으며
능청스레 꽃싸움할 수 있겠지요?
당신은 새벽 별보다 찬란하게 웃고
나는 밤새 문신(文身) 그려 넣으며
환장할
노래를 부를 테지요
화전(花田)이면 어떻고, 화전(火田)이면 어때요
아침가리 지나 곰배령이면 어떻고,
별꽃 피는 만항재면 또 어때요
잃을 것 뺏을 것도 없는 빈 들에 가서
꽃집 지어 벌 나비 들게 하고
수줍은 미소에도 찰랑거리는 도라지꽃처럼
속살속살 지저귀며
하루만, 하루만 더 살아요
*시집, 애초의 당신, 민음사
근황 - 김요일
고통을 뼈대 삼아 집을 지었죠
이젠 그립지 않아요
사막에서의 생활은 상상 너머의 일이죠
가끔씩 치유술사가 들러
차마 조율할 수조차 없는 참담한 일상의 아가리 속으로
새로운 정령(精靈)을 불어넣어 주기도 하지만
그런 게 다 무슨 소용, 누군가 버리고 간 늙은 낙타는
권태를 등짐 진 채
썩은 내 나는 침 뱉으며 모래언덕 넘어요
수취 거부 우편함엔 방부제 가루 같은 먼지만 쌓여 가고
휘휘친친 거미줄 감으며
홀로 잠들 그물 침대 깁고 있어요
애당초 천국이란 건 없었으니
이곳이 지옥일 리 없죠
나는 뻐덩뻐덩 말라 가는 물고기
누구든 내 영혼 사 가세요
비싸게 굴 이유가 없죠
*자서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부르고 싶을 때가 있다.
'Greep'를 부르고 싶을 때가 있다.
'아득히 먼 곳'을 '비처럼 음악처럼'을 부르고 싶을 때도 있다.
여기 있는 것들은 다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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