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산가옥 - 김재진
오랜만이야, 하고 속삭여 봤다.
많이 늙었네, 하며 돌아오는 소리가
복도 지나 먼지를 털며 걸어 나온다.
낮잠 자다 해거름에 일어나
학교 늦다고 허둥대며 가방 챙겨 뛰쳐나가던
어릴 적 초등학교 운동장에 서봤다.
변소에 빠진 아이를 씻어내던 수돗가에
여선생님 닮은 분꽃은 피지 않고
구충제 먹듯 아득해지는
옛길 일으켜 교문 나서면
문방구 건너 이발소, 줄장미 피던 양옥집 지나
삐거덕거리는 나무 계단 가파른
적산가옥 한 채 보인다.
자전거 타고 귀가하던 아버지가 눈에 밟혀
열차 따라 남쪽에 온 저녁
아랫목에 묻어둔 밥그릇이 달그락거리고
이불 위에 쪼그리고 앉은 다 늙은 소년 하나
발가락에 묻은 밥풀 떼내고 있는
옛날 살던 동네에 가봤다.
*시집, 산다고 애쓰는 사람에게, 수오서재
한 방울 - 김재진
아무것도 넘기지 못하는
노모의 입 속으로
물 한 방울 떠 넣으려 숟가락 쥐고 있다.
인생의 용량이 그만
물 한 티스푼으로 바뀌었구나.
바람 불고 낙엽 지고 그동안에
눈도 내렸다.
응달의 잔설은 사라지고 없어라.
봄은 또 들판에
파릇한 희망 하나 심어놓고 가겠지.
한 방울 물에도 사래 걸리는
산다는 건 모든 것이 혹독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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