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보네 장의사 - 김요아킴
그의 검은 수염은 세상의
모든 주검을 다 거두어가려는
객기로 어려 보였다
아니 간혹 삐져나온 흰털들이
캄캄한 밤에 떠다니는 소복 같아
외려 더 무서웠다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은 표정과
맞닿은 넓은 그의 이마엔, 애써
주름진 생계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상가의 근조등이 사위어지고
그가 저세상으로 보낼 운구의 흔적이
또렷한 지문으로 남아 있을
마을 길모퉁이 낡은 목조건물,
삐거덕거리며 한 짧은 그림자가 내는
소리보다 더 낮춰 어린 우리들은
까치발로 죽음을 피해 다녔고
시신이 드나들던 장의차 뒷문엔
아직 지워지지 않은 향내가
곡소리처럼 들려왔다
유년이 깊을수록 그 기억은
더욱 아련히 퇴적되어가고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육신이
그의 손에 맡겨져 있다
*시집, 그녀의 시모노세끼항, 황금알
세월이 잔인하다 - 김요아킴
잎이 피기도 전에
꽃봉오리는 떨어졌다
수상한 계절,
깊은 안개와
방향을 가늠키 힘든 바람이
때 이른 음모처럼 습격한다
제 스스로 물을 길어 올리며
한 점 한 점 단단한 살로
희망을 채워 나가던
사월의 그 하루가
몹시도 기울던 날
이를 막아줄 든든한 동아줄은
어디에도 없었다
얇은 습자지처럼 배어오는 공포와
턱밑까지 차오른 절망이
무수한 생채기를 내며
거대한 쇳덩어리 같은 무게로
순장되었다
새파래서 너무 슬픈
꽃봉오리들이 눈물처럼 흩어져있다
세월이 지독하게 잔인하다
# 김요아킴 시인은 1969년 경남 마산 출생으로 경북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2003년 계간 <시의나라>와 2010년 계간 <문학청춘>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가야산 호랑이>, <어느 시낭송>, <왼손잡이 투수>, <행복한 목욕탕>, <그녀의 시모노세끼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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