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잎에 어깨를 맞았다 - 권상진

마루안 2019. 4. 13. 19:35



꽃잎에 어깨를 맞았다 - 권상진



살아내는 일은 본전 생각 나는 투전판
패는 언제나 공평하게 돌아오지만
밑천 없는 승부는 자주 공평하지 않았다


가로수 꽃이 지고 있는 보도블록 위에서
꽃잎에 어깨를 맞았다
살다 살다 이제 꽃마저 나를 치는구나
없이 살다 보면 꽃에도 통증을 느끼고
가끔 그 자리에서 오기가 덧나곤 하였다


다 잃고 밀려난 뒷전에는
개평으로 얻은 나이가 제법 수북하다
더는 내일의 패가 돌아오지 않고
빈손으로 남의 패를 흘겨보는 내게
지나던 봄이 한심한 듯 어깨 한번 툭 치고 간다


그래, 낙화는
딴전 부리다가 애꿎은 시간만 간다고
넌지시 들려주는 봄의 헛기침


나는 꽃잎 다 지도록
그 소리 귓등으로만 듣고
하릴없이 빈손으로 삶 판을 기웃거리다
봄의 기척 소리에 꽃잎보다 더 놀라
남은 개평 주섬주섬 챙겨 뒷전을 일어선다


꽃물 든 어깨가 수인처럼
올봄 내내 붉겠다



*시집, 눈물 이후, 시산맥사








꽃의 죽음 - 권상진



꽃은 이내 저물어야 할 자리인 줄
알고 핀다


말갛게 눈꽃 이울던 자리에
움튼 꽃눈
한 열흘 혹은 보름쯤 세상을 누리다가
보는 이 아쉬울 즈음
꽃잎, 주저 없이 접을 줄 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추해지지 않은
고운 죽음
가만히 하늘 곁에 눕는다


선택의 경계에서 서성거리는
집착은 얼마나 추한 모습인가


꽃은 봄에 죽는다
보란 듯이 죽는다






# 첫 시집을 세상에 낸 시인의 기분은 어떨까. 아마 긴 산통 끝에 나온 자식을 보는 느낌일 게다. 잘 만든 시집 하나 열 자식 안 부럽다. 예전에 가족 계획이 한창일 때 표어가 생각난다. 예비군 훈련장에서도 훈련 면제를 댓가로 정관 수술을 해주던 시절이었다. 그 중 표어 하나가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였다. 패러디이긴 하나 내가 이 시집에 붙이고 싶은 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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