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도로남 - 신준수

마루안 2019. 4. 12. 21:51



도로남 - 신준수



가장 가까운 관계는

남남 속에 있다

뿌린 적은 없지만 어느 봄을 돌다가 불쑥

올라오는 복수초처럼 나타난다

같이 놀고 같이 먹는 동기들은 관계가 아니다

남남이라는 그 아득한 거리를 지키지 못할 때

그 중 견디지 못한 남남을 골라 님이 되는 일이 있고

그 님이 다시 견디지 못하여 남이 된다면

세상엔 남보다 더한 남이 무수히 많다

비어 있는 님의 곁에게

너그러울 수 없는 건 그 때문이다


우리는 각각 관계다

관계로 태어났고, 관계로 울었다


생각해 보면 참 좋은 님,

그러니까 님이 하나밖에 없다는 말은

어리둥절한 말이다

새로운 둘이 되면 하나는 반드시 남이 되는

불쑥, 관계는 관계처럼 찾아오는 일이기도 하여

집안에 낡고 굴러다니는 관계 하나가 있다


도로남이라는 노래가 있다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면 님이 되고

그 님도 여분의 점 하나쯤은 반드시 가지고 있다는 노래

둘이 되면 하나는 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

점 하나에 울고 웃는



*시집, 매운방, 애지출판








스르륵, 봄 - 신준수



오래된 벚나무에 폐비닐 척 걸려 펄럭인다

두 번 감아 길게, 로맨틱한 연출법이다

곧 늙으신 몸 여기저기 뚫고 나오실 주책없는 꽃송이들 어쩌시려고


고목의 봄날을 어찌 감당하시려고

가지에 놀던 곤줄박이 박새들 다 쫓아 보내고

두꺼운 엄동도 다 쫓아 보내고

머플러 척 걸치시고 나온

짧은 봄날의 외출


따뜻한 바람, 여러 겹으로 주름지는데

부쩍 머플러를 탐하시는 어머니 

어설프게 둘러 흘러내리고 밟혀 애물 되기 일쑤지만

새로 당도하는 꽃샘추위가 두려우신 게다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 두려우신 게다


고목을 뚫고 툭툭 튀어나오는 춘심

어찌 바람이 이리 달다냐

다 녹아 혀끝에서만 맴맴 도는 봄날의 끝


바람 불면 머플러처럼 스르륵,

풀릴 봄






*시인의 말


잠에서 돌아오지 않는 새 한 마리를

땅에 심어준 적이 있다

두 손을 모으기도 했던 것 같다

그때,

새의 육신에 잠시 머문 인연이

이렇게 시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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