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심장 - 마종기
어느 해였지?
갑자기 여러 개의 봄이 한꺼번에 찾아와
정신 나간 나무들 어쩔 줄 몰라 기절하고
평생 숨겨온 비밀까지 모조리 털어내어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과 라일락,
서둘러 피어나는 소리에 동네가 들썩이고
지나가던 바람까지 돌아보며 웃던 날.
그런 계절에는 죽고 사는 소식조차
한송이 지는 꽃같이 가볍고 어리석구나.
그래도 오너라, 속상하게 지나간 날들아.
어리석고 투명한 저녁이 비에 젖는다.
이런 날에는 서로 따뜻하게 비벼대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눈이 떠지고 피가 다시 돈다.
제발 꽃이 잠든 저녁처럼 침착하여라.
우리의 생은 어차피 변형된 기적의 연속들.
어느 해였지?
준비 없이 떠나는 숨 가쁜 봄날처럼.
*시집, 마흔두 개의 초록. 문학과지성
다섯 번째 맛 - 마종기
혀끝의 매운맛은, 정작
아픈 맛이라는 말에
아픈 것도 맛이 있다는 게
좀 이상하게 들렸는데, 그럼
단맛은 간지러움의 맛이고
신맛은 미움의 맛일까.
절망도 행복도 맛이 있다는 것,
더운 것이나 추운 것도
혀에게는 맛으로만 느껴진다는데
내게 오는 매일의 텅 빈 맛은
어디서 오는 어려운 맛일까.
빈 맛이 나이 탓만은 아니리.
손금에 자세히 만져지는 깊은 물길,
간절한 슬픔의 맛은 왜 부드러울까.
하늘을 헤집고 내게 오는 친구여,
두 눈에 맺히는 소중한 맛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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