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로 이 별에 와서 - 김주대
우주의 허공에 매장된 사건들은
빛의 속도로 발굴된다
수억년을 건너 과거가
불현듯 망막에 맺힐 때 초신성은 온다
모빌을 보고 눈 뜨는 아기처럼
눈 큰 짐승이 고개를 든다
지평선은 머리 위로 태양을 띄우는데
어둠을 밟고 별들이 와서
벌레처럼 많은 목숨으로 내 안에 꼼지락거린다
가장 간지러운 신경은 동공이 되어
우주의 먼 과거를 흡착한다
그러니까 나는 수억년 묵은 우주
가벼운 현재가 아니다
몸의 길목에 우두커니 서서
길을 잃고 빙하기처럼 경화되는 피가
내일을 미처 다 살지 못해도
구석구석 신성의 잔해를 움튼다
몸에서 빠져나가 버짐처럼 피어난 자식들과
눈물 한 방울이
수억년과 맞먹는 영광으로 살아야 하는
나는 태양의 위성에 아버지로 왔다
목숨 깊이 매장된 사건들이 살을 뚫고
한숨의 속도로 융기될 때
뜨거운 생은 만져진다
*시집, 그리움의 넓이, 창비
어디만큼 왔을라나 - 김주대
어릴 적 어느 겨울 고함을 지르며 걷어찬 아버지의 밥상을 안고 나자빠진 어머니가 된장 뒤집어쓴 채 죽은 개처럼 끌려 다니다 아이고 이봐요 한번만 봐줘요 왜 이래요 가끔 살아나 숨넘어가던 저녁이었나 형과 나는 또 아주 오래 제발 아부지요 아부지요 허우적거리다 죽을 줄 알았는데 무섭게 빛을 내며 장독을 깨던 아버지의 도끼는 달에서 계수나무를 찍던 것이었을라나 헛간 나무 그림자 속에 칼을 숨기던 형의 거친 숨소리를 따라 다니던 무서운 달빛은 머리카락만 듬성듬성 남기고 냇물 속으로 끌려가던 어머니 느들은 여 있어라 가마이 있어라 가마이 형과 나는 가만히 서서 울다가 이상한 고요가 다 흘러가고 냇물처럼 꽁꽁 언 어둠이 깊어져 어머니는 언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밥솥에 불을 때고 다 늦은 밥상을 다시 받은 형과 나의 숟가락에 고등어를 올려 주던 아버지 품에 안겨 술 냄새 지독한 숨소리를 하나에서 열까지 헤아리다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취하던 그때가 밤이었나 헛간에 숨겨둔 칼이 두려워 눈치를 보다 입에 밥알을 문 채 쪼그려 잠든 형의 좁고 굽은 무릎에서 목숨의 어두운 밑바닥 같은 걸 처음으로 보았던 그 어린 날이 지금 어디를 가고 있을라나 어디 만큼 왔을라나
# 김주대 시인은 1965년 경북 상주 출생으로 성균관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9년 <민중시>, 1991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꽃이 너를 지운다>, <나쁜, 사랑을 하다>, <그리움의 넓이>,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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