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로 마음먹은 사랑 - 정세훈
옥수수 알갱이들이 튼실하게 영글어 가는
옥수수 잎사귀 위에서
사마귀 한 쌍이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그 사랑이 이미 오랜 시간 진전되어 왔는지
암놈이 수놈의 몸뚱어리를
거의 다 먹어치워가고 있었다
사마귀가 사랑을 나눌 땐
태어날 새끼들을 위해
죽기로 마음먹고 시작한다지 않는가
그리하여 수놈이 암놈의 먹잇감이 되어
암놈이 수놈을 다 먹어 치워야
그 사랑이 비로소 끝난다 하지 않는가
죽기로 마음먹은 사랑을 한 끝에
홀로된 저 암놈 역시
머지않아 이 옥수수 잎사귀 위에
제 몸 스스로 새끼들의 먹잇감이 될
알집 하나 남겨놓고 생을 마감할 것이다
그리고 계절이 한 순배 돌고 나면
죽기로 마음먹은 그 사랑을 이어 갈
새끼 사마귀들이 하나 둘 태어나
옥수수 알갱이들이 튼실하게 영글어가는
옥수수 잎사귀 위에서
죽기로 마음먹은 그 사랑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시집, 부평 4공단 여공, 푸른사상
부평 4공단 여공 - 정세훈
늘 그녀들로부터 위축되어 있었다
맘에 드는 상대가 나타나도
내 처지만 생각하면
적극적으로 나서질 못했다
가까이 접근을 하면
공돌이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며
면박을 줄 것만 같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궁여지책으로 펜팔을 했다
펜팔 업체로부터 소개받은 그녀는
부평 4공단에서 여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립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연장작업, 휴일 특근작업, 36시간 교대작업,
공장 생활의 고단한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아프지만 병원 갈 돈이 없다는 소식이 오고갔다
"아프지만"이란 소식에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병원 갈 돈이 없다"는 소식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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