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청춘의 기습 - 이병률

마루안 2018. 12. 3. 21:32



청춘의 기습 - 이병률



그런 적 있을 것입니다
버스에서 누군가 귤 하나를 막 깠을 때
이내 사방이 가득 채워지고 마는


누군가에게라도 벅찬 아침은 있을 것입니다
열자마자 쏟아져서 마치 바닥에 부어놓은 것처럼
마음이라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버릴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잃었다면
주머니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계산하는 밤은 고역이에요
인생의 심줄은 몇몇의 추운 새벽으로 단단해집니다


넘어야겠다는 마음은 있습니까
저절로 익어 떨어뜨려야겠다는 질문이 하나쯤은 있습니까


돌아볼 것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부리로 쪼아서 거침없이 하늘에 내던진 새가
어쩌면 전생의 자신이었습니다


누구나 미래를 빌릴 수는 없지만
과거를 갚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지성








노년 - 이병률



어느 날 모든 비밀번호는 사라지고
모든 것들은 잠긴다


풀에 스치고 넘어지고
얼굴들에 밀리고 무너지고


감촉이 파이고
문고리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는 오래 빈집을 전전하였으나
빈 창고 하나가 정해지면 무엇을 넣을지고
결심하지 못했다


돌아가자는 말은 흐릿하고
가야 할 길도 흐릿하다


오래 교실에 다닌 적이 있었다
파도를 느꼈으나 그가 허락할 만한 세기는 아니었다


서점 이웃으로도 산 적이 있었다
경우에 따라 두텁거나 가벼운 친밀감이 스칠 뿐이었다


오래 붙들고 산 풍경 같은 것은 남아 있었다


중생대의 뼈들이 들여다보이는 박물관 창문 앞을 지나는 길
늘 지나는 길인데
보내고 보내고 또 보냈을 법한 냄새가 따라붙었다


'여기'라는 말에 홀렸으며
'그곳'이라는 말을 참으며 살았으니


여기를 떠나 이제 그곳에 도달할 사람





# 무슨 말을 하려는지 시인의 의도를 알아 채기 쉬운 시가 마음을 울린다. 젊어는 봤으니 늙을 차례는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것, 저 멀리 아득해진 청춘이 돌아올 리 만무하지만 도달할 곳 또한 아직 멀었다. 시 읽는 초겨울 밤이 아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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