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족의 힘 - 류근

마루안 2018. 12. 2. 20:36

 

 

가족의 힘 - 류근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등켜 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을 봐 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 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 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 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대한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시집,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


 

 



사람의 나날 - 류근


우리끼리만 아는 하루를 남겨두는 것이었다 우리 약속의 언어는 지상의 것이 아니니 해가 뜨고 불이 꺼지고 머리 검은 사람들이 돌아오는 세상에선 한 소리도 입과 귀를 지나치지 못할 것들이었다 여기서 나날들은 짧고 무성했으므로 사람의 언어로 꽃을 피우는 일이 은혜로울 수 없었다 어떤 떠돌이 하늘의 영광도 이룩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약속의 피로 사람을 씻고 불꽃의 파란 혀로써 먼 별의 언어를 지었던 것이라 이는 우리 약속의 순결함을 가장 높은 곳에서 증거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날마다 날이 저무는 사람의 육신 안에서 한 슬픔도 끄지 못할 나날들이 이리 길 것을 몰랐다 사람의 언어만으로 온전히 사람의 슬픔을 슬퍼하게 될 줄 몰랐다 아직은 지상에 머문 그대여, 먼 별의 약속 한 평 허물어서 시방 허물어진 내 가슴에 젖은 발음을 기대어다오 사람의 언어로 뭉게뭉게 피어나 단 하루라도 좋을 사람의 나날을 지나가고 싶다

 

 

 

 

*시인의 말

진정한 지옥은 내가 이 별에 왔는데
약속한 사람이 끝내 오지 않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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