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수문통 언니들 - 이설야

마루안 2018. 11. 23. 20:33



수문통 언니들 - 이설야



수문통시장 언니들
단발머리 쥐가 파먹은 듯
잘리고 뒷골목에 모여
도루코 면도날을 씹다가 뱉었다
학교 가는 아이들 돈 빼앗다가
창고에 갇혀 울었다


입속에서 부서진 집들


언니들 머리채 잡고
시궁창 속으로 미끄러지던 손
찢어진 치마 속으로 들어가던 두꺼운 손


못 박힌 별들이 하나둘 켜지면 언니들
달처럼 몰래 광 속에서 빠져나와
깡시장 오빠들과 자유공원에 올라갔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면도날을 나눠 씹었다


아직 뱉지 못하는 말들


언니들 조금 더 자라자
볼록한 배를 광목천으로 꽁꽁 감고
해바라기 검은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던
톱밥 가루 날리던 목공소를 지나
굴다리 밑을 또각또각 지나
동인천 일번지다방에 나갔다
나가서 돌아 오지 않았다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창비








천국수선집 찾아가는 길 - 이설야



바바리코트를 수선하러 천국수선집 찾아간다
분명 옛 수문통시장 건너편 길이었는데
굴다리 밑 도로공사 중인 곳을 몇번이나 돌고 돌아도 없다
한 블록 지나자 간판 글씨가 희미하게 지워진 수선집이 보였다
늙은 수선공은 귀에 보청기를 끼고 있었다


-여기까지 줄일 건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요?
-나 성당에 가서 창문을 다림질할 거야
-네? 뭐라구요?
-너도 미사에 오면 새것처럼 수선해줄게


수선집 벽에 걸린 옷 속에서 삐져나온 하얀 날개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벌레처럼 보였다


흰 초크가 바바리코트 위를 삐뚤빼뚤 지나갔다
작업대 위 다리미는 안개를 내뿜다가 뜨겁게 앉아서 창밖을 골몰했다
늙은 수선공은 어깨와 궁둥이를 자르다가
재봉틀에 기름을 치고 노루발을 만지기 시작했다
나는 수선공이 성당에 가서 어떤 것을 수선해올지 궁금해졌다
안개가 머릿속으로 몰려왔다


고친 바바리코트를 입고 굴다리 밑을 또 돌아 가는데
이름도 수상한 천국수선집이 여전히 없다
늙은 수선공이 수선한 호주머니 속은
천으로 덧댄 어둠만 기다릴 뿐


그 수선집이 사라진 천국수선집인지
원래 없던 수선집인지 점점 더 알 수 없는


저녁이 또 지나가고 있었다






# 우울하지만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시다.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익숙한 공간이어서 더욱 공감이 간다. 불량기 가득했던 내 10대 시절, 학교 가기 싫어 늑장을 부리던 아침이면 옆집의 공순이들도 가기 싫은 공장으로 출근을 했다. 하기 싫었던 일들이 애틋한 기억으로 남은 걸 보면 나이를 먹은 건가.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 그리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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