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장 깊은 발자국 - 원무현

마루안 2018. 11. 23. 19:45



가장 깊은 발자국 - 원무현



어느 노시인의 낙타가 십 리 밖 물 냄새를 맡고 있을 때
나의 낙타는 지금 먼 세월 밖 내 무덤 냄새를 맡고 있다


한 많은 이 세상 다시는 오지 마라
지상에 남겨진 자들이 다리에 쥐가 나도록 내 봉분을 밟을 때
무덤 밖으로 한사코 빠져나가는 냄새
읽어주지 않는 책처럼 골방에 꽂혀
한 줄 시에 대한 절망과
그 절망만큼이나 잔인하도록 달콤했던 사랑을 앉혀놓고
자작(自酌)을 하던 퀴퀴한 냄새


코끝이 아리다, 2014년 오늘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면
사막처럼 목이 타는 달동네
손바닥만한 바다가 창틀에 담긴
영주동 산복도로에 서 있는 나의 낙타!
참았던 재채기를 한다, 체중이 실린다


나의 낙타가 가장 깊은 발자국을 남기는 순간이다



*시집, 강철나비, 빛남출판사








머나먼 귀가 - 원무현



똥쌍피와 비쌍피가 잡혔다
두려울 게 없는 쌍칼을 쥔 것이다
하지만 오늘도 연거푸 당한 피박에 광박
멍청한 놈의 전유물이라는 멍박이었다


먹을 거 안 먹을 거 가려먹을 수 있는 고수는
얼마나 속이 쓰라려 본 뒤에나 이를 수 있는 경지일까
낙장불입, 한번 던진 잎사귀는 거둬들이는 법이 없는
포플러나무가 눈 내린 새벽 삼지창 눈부시게 뽑아들고
위풍도 당당한 이유를 아느냐 하수여


아흐, 하수도 고수도 다 떠난 공산에 보름달은 떠서 환하고 환하지만
흩날리는 것은 승자의 깃발이 아니라 개털이다
듣기만 해도 소름 돋는 마누라 바가지 긁는 소리도 소리지만
무엇을 잘 못 먹어 설사를 했는지
이미 끝난 판을 꺼내보며 고 스톱 고 스톱
가다 멈추고 가다 멈추는 귀가는 멀고도 멀다





# 약간 지루한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고 나서도 인상 깊은 장면 하나와 대사 한 마디만 건지면 본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시에서도 한 문장만 고르라면 <한 많은 이 세상 다시는 오지 마라>다. 흔히 쓰는 상투적 표현도 시인이 쓰면 시가 되는가. 십 리 밖 물 냄새를 맡고 있는 낙타나 세월 밖 내 무덤 냄새를 맡고 있는 낙타나 본래 같은 낙타다. 2014 년의 낙타는 아직도 달동네의 골목길을 서성이고 있으니,, 어차피,, 나도 한번 멀리 떠나면 다신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문통 언니들 - 이설야  (0) 2018.11.23
농담 - 주영헌  (0) 2018.11.23
줄기가 나를 세운다 - 서규정  (0) 2018.11.22
언저리의 슬픔 - 박노해  (0) 2018.11.22
서커스 - 정창준  (0) 2018.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