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낙과 - 정와연

마루안 2018. 11. 15. 20:01



낙과 - 정와연


낙과를 파는 코너에 길게 줄 서 있는 사람들
낙과를 사기 위한 줄이라니
마치 과일나무 밑을 두리번거리듯
수풀을 헤치듯 서 있는 사람들
옛말에 낙식은 공식이라 했는데
어떤 마음이 저리 길어 파치 앞에 기다리고 있나
모두 한 번쯤 낙과였던 기억이 있다는 듯
체온이 묻은 낙과를 손으로 받아보았다는 듯
줄을 서 있는 태풍의 끝,
쓱쓱 닦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한 사람이 한 봉지씩 들고 얼굴이 환하다
낙과는 색이 변한 부위가 가장 물렁하다
물렁한 부분은 빠른 속도로 변한다
모두 자신의 물렁한 부분을 알고 있다는 듯
한 번 더 물렁한 부분을 만져보겠다는 듯
즐거운 배급,
한 사람이 열 개라면 열사람이면 백 개
위로받는 사람보다 위로하는 사람이 그 배수(倍數)다
붉어지다만 낙과들이
그 어느 것보다 오늘은 상품(上品)이다
한낮의 위로의 줄이 길다
태풍의 긴 머리채가 휘감았던 나무 밑
굴러 떨어져 멍이 든 것들
아삭아삭 풋것 베어 무는 소리를 생각하면
그 맛,
위로의 맛이리라는 것도 짐작하겠다



*시집, 네팔상회, 천년의시작








말(馬) - 정와연



수선집 사내의 어깨에 말의 문신이 매어져 있다
길길이 날뛰던 방향 쪽으로 고삐를 묶어둔 듯
말 한 마리 매여 있다
팔뚝에 힘을 줄 때마다
아직도 말의 뒷발이 온 몸을 뛰어다닌다
고삐를 풀고 나갈 곳을 찾고 있다는 듯 연신 땀을 흘린다
저 날리는 갈기를, 콧김을, 이빨 드러내는
투레질을 굵은 팔뚝에 가둬두고 있다는 것을
저 사내 알기나 할까
어쩌면 질풍노도의 시절에 스스로 마구간을 짓고
지독한 결심으로 고삐를 매어두었을지도 모른다


말은 복종하는 발굽과 항거하는 발굽이 다르다
앞발을 굽힐 때 뒷발은 더 빡세게 버티는 법이다


어느 뒷골목의 시간들을 붙잡아
사내의 안쪽을 향하게 단단히 묶었으나
꿈틀거리는 역마살이란 언제까지 갇혀있을 발굽이 아니다
비좁은 마방에서 수년 째 구두를 깁는 일이
자못 수상하기까지 하다
닳고 닳은 뒤축을 깁는 일과
말의 박차를 박는 일에 우연(偶然)이 있다면 그것은 다 길의 파본이다


발굽을 갈아 끼울 때마다 사내는
박차고 나가려는 팔뚝의 불뚝한 말을 오래 쓰다듬듯 주무른다
이제야 말 한 마리를 다룰 줄 안다는 듯
말과 주인이 따로 없다는 듯이






# 정와연 시인은 1948년 전남 화순 출생으로 숭의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3년 <부산일보>와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본명이 정길례로 아주 토속적인 이름을 가졌다. <네팔상회>는 칠순의 나이에 낸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