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기다리는 것은 기다리는 것 너머에 있다 - 임경섭

마루안 2018. 10. 19. 21:23



기다리는 것은 기다리는 것 너머에 있다 - 임경섭



기요가 지나간 자리에서
두툼한 유리문이 느리게 닫히고 있었고
그녀를 따라 들어온 적도 해협의 습한 온기가
제자리를 잠시 맴돌다 사라지고 있었다


아침부터 서둘렀지만
공항에 들어선 순간부터
자신을 제외한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른 귀국을 방해하고 있다고
기요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재촉하던 걸음 앞으로
몸집만 한 짐들을 곁에 둔 이국의 사람들이
각자의 장소에서 저마다의 방향으로 줄지어 서 있었고
긴 줄 너머로
항공사 직원들이 사람들의 여정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표정 없이 티켓을 끊어주고 있었다


탑승 시간은 정해져 있었고
그 시간까지는 두 시간도 넘게 남아 있었다
서두른다고 시간이 당겨지지는 않는다는 걸
기요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출국장 훨씬 더 너머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요가 이미 지나온 길 위에서
더운 공기가 자주 맴돌다 사라지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을 떠올릴수록
가야할 길이 더 길어지고 있다고
기요는 생각하고 있었다



*시집,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창비








비가 와서 - 임경섭



수많은 명분들이 낭자하는 가운데
비가 내렸다 비가 와서 형은
사랑에 지쳤고 비가 와서 형은
애인의 살냄새에 싫증을 느꼈다 비가 와서
그렇게 비가 와서
형은 창문을 열 수 없었다
비를 핑계 삼아 기어코 형은
자신의 가벼운 고통들을 덜어내고자 했지만
그것들은 장마처럼 검질기게 창에 달라붙어
긴 기간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만큼 떨어지는 방울들
알알이 떨어지며 스스로 잘게 부숴
촘촘히 갈라지는 방울들
지상의 모든 지붕에 부딪혀 으스러지며
재생을 거듭하는 물방울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만큼 흩날리는
변명은 형의 변명은
비가 와서
형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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