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의 힘 - 이광복
마악 나뭇가지 사이로 발을 내뻗어
나뭇잎마다 발자국을 환하게 찍고 있는 아침 해를 바라보다 문득
저 텅 빈 허공이
해의 발자국을 나뭇잎까지 끌고 온 길이었음을
본다
그 길 위로
또 하루 고단한 삶을 묻으며
가볍게 발을 내딛는 한 무리의 새떼들
스스로 제 몸을 열어 길이 되 준 허공엔
비와 바람과 온갖 소리들은 얼마나 많은
발자국을 묻어두었을까
이른 봄날
겨우내 깊은 겨울잠에 든 나무들 흔들어 깨워
여름내 한 뼘씩이나 일으켜 세우더니
손가락보다 가는 나무의 몸에서
수천수만 송이 꽃송이를 끄집어내고 열매를 둥글게 키워내는
허공의 저 부드러운 손길
생을 다한 잎새의 마지막 슬픔까지 가만히 끌어안는
허공의 가슴팍 안으로
가을은 더 진한 슬픔의 빛깔로 우수수 무너질 때
잠시 저 슬픔 쪽으로 살며시 마음 기대었을 뿐인데
기우뚱 기울어지는 계절
먹먹하게 내려앉는 허공의 무게에 눌려
한바탕 몸살 앓는 내 몸
*시집, 발이 버린 신, 문학의전당
빈집 - 이광복
사랑이 떠나버린
벌레들이 쓸고 간 기둥마다 골다공증을 앓고 있는
바람의 길이 되어버린 몸
허리가 구부러졌다
처마 끝에 잘려나간 전선줄로 귀가 닫혀
풍문으로 떠돌던 소식조차
먼지 쌓인 알전구로 캄캄하고
백회 곱게 올렸던 벽마다 얼룩진 검버섯
비바람에 깊게 패인 주름살 같은 틈새마다
풀벌레 울음이 무성하게 자랐다
이제 벽은
구들장의 따스했던 기억조차 가두어놓지 못한다
부서진 채 힘없이 매달린 문짝과
여기저기 깨진 앙상하게 이빨 빠진 유리창들
바람 속에 내뱉는 덜컹거림은
누군가를 기다리다 지친 한숨 섞인 몸부림이다
저 몸부림 속에는
떠나간 사람들의 마지막 뒷모습이
아픈 기억으로 흔들린다
# 이광복 시인은 충북 영동 출생으로 2003년 <전북중앙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5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수혜했다. <발이 버린 신>은 등단 14년 만에 낸 첫 시집이다. 겸손함이 묻어나는 시인의 말이 인상적이다.
*시인의 말
밥도 죽도 되지 못하는 시 나부랭이를 쓰겠다고
사람 냄새 폴폴 날리는 그런 시를 쓰겠다고
오늘도 세상을 뒤적거린다.
그러나
내 시는 늘 부족함이 많아
선뜻 세상에 내놓기가 두렵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어쩌면 나를 찾아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걸어온 길을
잠시 여기에 내려놓는다.
더 먼 길을 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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