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구멍과 꼭짓점 - 전형철

마루안 2018. 9. 7. 20:42

 

 

구멍과 꼭짓점 - 전형철


그가 떨어지자 구멍이 생겼다
낮과 밤의 주기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붙어 버린 다리 사이로 마른 바람이 불어 아주 조금씩 말라간다
이적(異蹟)을 이적(利敵)으로 바꾸고 싶은 꼭짓점이 예의를 차린다
통점은 쉽게 무디어진다 내심 안심하기도 한다
꼭짓점에 묶인 마성의 끈이 허공에 채찍질을 해 댄다
예술적으로 요란한 소리가 침묵을 두드린다
더 이상 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다
목덜미를 찾아 물고 싶었으나 청맹과니들의 눈에 진딧물만 꼬여 든다
빛을 걷어 내었는데도 뿌리는 자란다
뿌리는 구멍 속에 자란다
콩나물이 지루에서 자라는 이치다

꼭짓점이 간단없이 불편하다 구멍이 세상의 배면을 철(撤)했다


*시집, 고요가 아니다, 천년의시작

 

 

 




자라 - 전형철


엄마가 작두를 타면 바람의 다리가 부르튼다며
형은 도리질을 해 댔지
대낮에도 길을 잃는 아버지와
어둠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밤마다
장대에 검고 붉고 노란 깃털들을 매고
기억을 잡아먹는다는 귀신을 불러내던 성만이 형
손가락 세 개를 빚잔치에 넘겨주고
자라를 잘도 잡던 자라손 형
자라목을 따며 형이 말했지
세상의 바닥에 닿는다는 건 닻을 숨기고 칼을 품고
제 살의 비린내를 맡아야 한다고
아이비 유제였던가 아이보리 색깔 나는
농약을 먹고 납작 엎드려 먹은 걸 게울 때
항아리에 잡아 놓은 자라들이
울타리를 슬금슬금 넘어가고
형은 자라손으로 마당을 차분히 쓸고 갔지
골목 가장자리에 먹은 걸 게울 때마다 집 먹감들을 생각해,
단감을 심어도 땡감이 되는 우리의 뒤란
항아리 바닥을 뚫고 가라앉은 자라손 성만이 형




# 읽기가 다소 불편하면서도 묘한 중독성이 있는 시다. 내가 원하지 않은 행성에 도착했기에 삶은 부조리한 것인가. 인생은 출발 시점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 그래서 아름다운 것,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 시작부터 어긋난 내 인생 또한 불행이 예견되었다. 돌이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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