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은 술집 - 김점용
한잔 따라라
깨진 술병, 넘어진 의자는 내버려두어라
쓰러진 저놈이나 일으켜 세워
눈구멍에 불질러주어라
아직도 시험해볼 패가 더 남았더냐
그림자가 짙구나
잔 받아라
그래그래 칼자국 같은 잔손금은 그렇게 감추는 법
내 오늘 밤을 타일러 길 하나 열어줄 테니
실패자인 너는 죽음처럼 꽂혀 있다
새벽 미명에 다음 생인 듯 나가거라
왜 이렇게 조용하냐
천산지산을 불러올까 곡조 늘어지면
잠 못 드는 밤새들 머리 풀고 울게 하고
걸쭉한 씹담으로 시냇물을 더 보태라
어차피 우린 기댈 데가 없는 사람
내 주위가 어찌 이다지도 깨끗하단 말이냐
한잔 더 따라라
슬픔은 수십 채의 집을 지었다 허무나니
아직 멀었다
세상의 두꺼비집이 다 내려가도
저 홀로 불 밝힌 밤늦은 술집
제 영혼을 꺼트리지 못한 사람처럼 밤새워 운다
*시집,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문학과지성
부장님 앞에서 - 김점용
자네, 오늘 회식 또 빠지나?
일만 한다고 되는 게 아냐,
사람이 좀 어울릴 줄도 알아야지
우리하고는 물이 다른가?
솔직히 재미없어요
같이 술을 마셔도 정신만 맨숭맨숭한 게
저도 참 지랄 같습니다 순간순간을
결재를 받는 기분으로 살 수야 없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저의 취기는
귀가길 실내 포장마차 후미진 상처의 흔적에서나
천천히 달아오르는 걸,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나이 들면 때론
책상도 책상이다 말할 수 없다는 거
물이 다르다뇨, 밥숟갈 앞에서
꿀꿀거리는 슬픔은 여전하고요 더 늦기 전에
주택 부금도 하나쯤 들어야겠다 싶어요 다만 저는
하루를 뒤집듯 고기를 뒤집고 말을 뒤집고
신문과 품의서의 행간을 술잔으로 채우다가
상계동으로 목동으로 일산으로 분당으로 흩어지는 그런 자리가
늦봄 음지에 마지못해 피었다 지는 개나리처럼
잘못 낀 자리 같다는, 그러니까 제 말은....
그러나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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