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전생 - 이선영

마루안 2018. 9. 7. 20:15



전생 - 이선영



그대는 몇백 살을 이승에서 빌어먹고 있는 고단한 혼인가
나는 몇백 살을 이승에서 굴러먹고 있는 여물지 못한 혼인가


서로의 뒤꼭지만 백 년 스치다가
서로의 얼굴만 백 년 익히다가
백 년은 그대와 나의 말이 몇 토막이고 얽히다가
그 다음 백 년은 그대와 나의 맘이 섞이고
그래서 지금 그대와 나는 백 년을 살을 섞자 작정하였던가


나와 엮인 백 년이 살짝 지루하다고
그대 입이 말을 꺼내기 전에


이제 나는 몇백 년 그대에게서 살곰살곰 도망칠 것이다
몇백 년을 그렇게 까치발로 애써 흘려 보내고 나서
그때의 그대 입으로 백 년이 살 같음을 한하는 장탄식이 새어 나오면
나 멀리서도 그 한소리 귀 세워 듣고 얼음산 불의 강을 건너
그대와의 새로운 백 년을 시작하리라



*시집, 하우부리 쇠똥구리, 서정시학








가족사진 - 이선영



매미 울음소리 들리는 7월의 어느 호젓한 날
시골에서 크느라 검게 그을린 세 살짜리 사내아이와
몇 달 만에 한 번씩 보는 낯선 동생을 종종 시샘하는
여덟 살 초등학생 그아이 누나와
책으로 둘러싸인 도회의 방 한 칸에서 그이 생과 씨름하고 있는
새하얀 얼굴의 아이 아빠를 한자리에 모아 놓고
출퇴근이 몸에 맞는 건강식품이 돼 버린 아이 엄마가
가족 사진을 찍는다
나무에게서 제 몸을 만들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나오는 가지들처럼
같은 나무에 매달려서도 바람 부는 쪽으로 흔들리기 일쑤인 세 식구들
붙잡고 달래 가며 겨우겨우 한 화면에 몰아넣고
다짐하듯 두 손아귀 안에서 셔터를 꾸욱 누른다
뜻대로 잡혀 들어오는 것만은 아닌 너른 세상을 배경으로
뿔뿔이 흩어지려는 것들을 묶어 놓고 보니
아, 뜨고 있는 한 쪽 눈 속으로 다 들어오는
요거밖에 안 되는
요렇게 작은 뭉텅이
요것이, 단번에 가슴을 내려앉게 하는,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