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픔만이 생을 부축하네 - 이은심

마루안 2018. 9. 4. 21:31

 

 

아픔만이 생을 부축하네 - 이은심

 

 

정맥 푸른 링거줄에 병명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쓰린 속을 나물로 무쳐놓고 돌아서면

당신은 꽃 없는 그늘

해바라기를 피우자고 처방받은 땡볕 아래다

 

이별이란 함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때 창문을 흔들어 오는 것

 

죽음과 병의 서열을 따져도 쓸데없는 병동의 감수성이

문턱을 간신히 넘어가고 갑자기 비어서

가벼워진 손으로 나는 머리핀이나 고쳐 꽂는다

 

통점에 스치는 강물처럼 잠이 없는 사람

겹겹 피에 젖는 당신은 간구할 것이 많아

오늘은 앞 강물이 검고

꿈에서는 병에서 돌아오는 나를 업고 강을 건네주었다

 

담요자락을 물들이는 절명의 꽃무늬

 

좀 전에는 생 하나가 후딱 떨어뜨린 슬픔이

소나기가 되는 것을 보았고

 

다 왔다 다 왔어

당신의 쓸쓸한 말이 지척에 붐빈다

 

 

*시집, 바닥의 권력, 황금알

 

 

 

 

 

 

바닥의 권력 - 이은심

 

 

나는 앞으로만 나아간다

하늘가는 밝은 길을 앞세우고*

담배꽁초와 검은 발목 사이를 박차고 전진한다

목석의 항목들을 바구니에 담은

이 찬란한 난장에 잔디 깔린 후방은 없다

 

고무로 만든 하반신 속에 멀쩡한 다리가 자라고 있을 거라고

네가 우기는 동안

나는 줄곧 피죽도 못 먹은 바닥이다

 

육체는 희미하고 일생의 지도는 낡았으나

박수를 치던 손바닥도 껍질 벗어지는 바닥인데

 

몇 그루 별마저 떠나간 이 시장통에서

그날을 기다리는 내게 그날은 없다고 앞을 가로막는 너희들

 

환도뼈가 내려앉은 밑바닥이라고 다 천박한 것은 아니다

 

자꾸 목이 쉬는 것은 엄마가 없기 때문이지만

질경이 사마귀풀과 사귀는 이곳은 신의 얼굴도 둥글게 펴지는

낮고도 아픈 세상이다

 

질퍽한 바닥에 귀를 대면 젖물 흐르는 소리

섬마섬마 어린 날을 휘돌아오는 소리

 

기저귀가 다 젖도록 화장실 한 번 못 가도

비가 오면 등이 먼저 젖어도

흙 묻은 가슴으로 쟁쟁하게 앞으로만 간다

나의 왕복에 뒷걸음질은 없다

 

 

*한국찬송가공회 찬송가 54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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