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살아가는 이유였다 - 이형근
햇빛 좋은 날
죽음 위를 서성거렸다
그늘진 곳이 없다
목마름에 사라질까 겁이 났다
시원한 자리를 찾았다
내 영혼에게 물었다
네가 지금 있냐고
바람이 문질러 버린 게
지금 그 죽음이었냐고
바람 좋은 날
죽음 위를 서성거렸다
바람이 멈춘 그곳에서
끝가지에 매달린 영혼을 보며
피카소가 되는 꿈을 꾸는
네가 지금 있냐고
죽음이 독버섯처럼 퍼졌다
살쾡이 달아 난 샘터에서
묵선을 하며 악수를 마시고 있다
간밤 꿈에 나는 죽었다
영혼은 몸을 죽이고 있지만
몸은 영혼에게 사자밥을 먹였다
벗어 놓은 옷가지를 태우고
신발은 나란히 여행을 떠났다
알몸이 춤을 추며 따라 가고 있었다
역시 내겐 평안한 축제였다
꿈에서 깨어난 날 아침
화선지에 먹물을 뿌렸다
발바닥으로 지난 꿈을 그렸다
덧칠한 나한의 유희가 뭉개졌다
그 상(相)이 다시 피어올랐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시집, <한낮, 시가 무릎에 앉았다>, 불교신문사
낯선 길에서 - 이형근
햇살도 소슬바람도
버거운 짐을
내려놓으라 채근한다
알알이 옥죄었던
한 생의 매디매디
곳곳에 걸려 넘어진다
몸은 남루를 끌고
마음 먼저 앞세우다
길게 늘인 그림자의 키
헛헛한 세월을 견디느라
더러 흰 머리카락만
길목마다 늘어뜨리고
저리 홀로 떠도는가
긴 여정 속에 배어 든
속살을 도려내고
지나 온 허상들을
뚝 끊어야 할 시간
어디 먼 낯선 번지
전환의 사계마다
꼭짓점에서 되돌지만
다시 텅 빈
한 점, 한 점
# 인생을 달관한 듯한 원로 시인의 세상 보는 눈이 한없이 마음을 시리게 한다. 나는 왜 발랄하고 말랑말랑한 시보다 이렇게 무겁게 가라 앉은 시에 마음이 끌릴까. 시 읽는 방향도 마음을 닮아가는가. 하긴 어둡고 우울한 것을 좋아하는 것도 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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