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 무화과나무를 찾아서 - 이성목

마루안 2018. 9. 4. 21:59



꽃, 무화과나무를 찾아서 - 이성목



그대, 꽃다운 나이에 꽃피지 못하고
불혹에 다다른 나를 찾아왔네.


불볕처럼 뜨거웠으나, 지금은
사라져버린 봄날에 대하여 말해 주었다네.
이미 가지에는 과일이 농하고
나는, 꽃을 기억하지 못하는 불구가 되었다는 것도


늦었다. 너무, 늦었다.
지친 잎들이 붉은 얼굴로 나를 뛰어 내렸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네.
꿈에 조차 볼 수 없던 것이 만개였으니,
모든 꽃들이 결국 지고 마는 것이라 해도
나는 받아들이려네.


세상의 뒷마당 한 구석에 얕게 내렸던
나무뿌리 뻐근하게 힘을 주는 동안만이라도
순간만이라도



*시집, 뜨거운 뿌리, 문학의전당








무화과를 먹는 저녁 - 이성목



지난 생에 나는 거기 없는 당신을 기다리는 벌을 받고 울다가 내 안으로 들어와 몸져누운 날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우두커니 서서 육신을 익혀가는 계절, 몽둥이에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엉덩이에 푸른 멍이 번지던 저녁이 있었습니다.


한 시절 몸을 탐하느라 나를 잊을 뻔도 했습니다. 아파하려고 꽃이 나에게 왔었다는 것, 위독은 병이 아니라 이별의 예각에 숨어 피는 꽃이라는 것조차


거기 없는 당신을 기다리다가 끝내 당신 속으로 들어간 마음이 진물처럼 흘러나와 어찌할 수 없을 때,
바람은 스스로 지운 꽃냄새를 풍기며 선득하게 나를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없다면 어느 몸이 아프다고 저렇게 큰 잎을 피워내서 뒤척일까요.


아무렇게나 태어난 아이들이 골목길로 꿀꺽꿀꺽 뛰어드는 환청, 꽃을 숨기느라 땅이 저물고 하늘이 붉어지는 것을 몰랐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적 없는 꽃냄새가 당신도 없이, 입안에 가득하였습니다.



*이성목 시집, 노끈, 애지






# 무화과는 얼마만에 익는 걸까. 약 8년 터울을 두고 각각 다른 시집에 실린 시다. 무화과 빛깔이 몽둥이에 두들겨 맞은 멍자국처럼 푸르딩딩한 이유가 있었다. 지난 생에 없는 사람을 기다리는 벌(罰) 때문이라는 것을,, 무화과가 맛있게 익어가는 계절에 마주한 시가 긴 여운을 남긴다. 무화과 향기처럼 잘 숙성된 이 맛에 나는 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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