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벌목 - 김상철

마루안 2018. 8. 27. 19:39

 

 

벌목 - 김상철

 

 

꽃봉오리 톡톡 차서 땅에 떨구는 아이의 무심한 발재간처럼

애증의 무게도 없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같은 나이테를 자른다

 

새 길이 난다고 사람들은 덕담을 피워냈지만

한 번 불고 길게 멈춰선 바람처럼

노인은 초록 묻은 가지 끝에 서성거렸다

 

타관객지 떠돌던 스무 여남은 적

맨 먼저 그려지던 풍광이었다

그늘의 후덕함을 들은 건

종종거릴 무렵 할아버지 수염 밑에서였다

 

나무 섰던 자리가 휑하니 허공으로 뚫릴 때

먼저 간 이들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절며 끌며 부뚜막 오가던 할마시 가고

재 넘어 살던 누, 날 보자 하더니 가고

고삐 끌러 제 목에 걸고 혹부리도 가고

해산달에 숨넘어간 몰래 엿보던 순례도 가고

아버지 어머니 고모 농약 마신 외사춘 동생

하나씩 하나씩 모두 다 가고

 

이 세상으로 든든히 묶어주던 연줄 차례차례 끊어져

구름 다니는 허공을 향하여 자꾸만 자유로워지는

 

누워 있는 나무의 키가 작다

해 뜨고 지는 일을 닮아 말려도 가고 아니 말려도 가고 마는

 

둘러보면 낯선 사람들

새 길이 난다고 덕담을 피워내고 있다

 

 

*시집, 흙이 도톰한 마당에 대한 기억, 고두미

 

 

 

 

 

 

꽃 - 김상철

 

 

나무도 있고 새도 날고 해서 이쪽 삶이야 조금은 언급할 수 있지만 저쪽 어딘가에 있는 삶이야 보도 듣도 못했으니 추측할 밖에. 누구는 저생生을 멀리 황천에서 찾지만 이생生에 살던 것 죽어 땅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못 봤으니 나는야 발밑에서 찾을 밖에. 오늘 아침 내가 섰는 마당에 예쁜 꽃숭어리가 하나 솟아났는데 이는 저생에서 밀어올린 것이라 하여 나는 오래 들여다보았다.

 

꽃숭어리의 맨 처음 조상이 이생에 나왔을 때 초행의 길이 하도 황당하여 영 엉망으로 살다간 뒤 다음 조상 때부터는 저들의 길을 개척하고 행동을 분별하여 저들 후손이 행할 길을 제 몸 속에 기록하여 남겼으리라. 그래 이 꽃숭어리도 제 아비가 하였던 것처럼 봉우리를 열고 또 지금은 바람에 한들거리는 것이다.

 

내가 지금 저 어린 꽃숭어리를 붙잡고 천 년을 살다가는 은행나무 얘기를 들려주면 어떨까. 그러면 저는 제 조상의 유언을 거부하고 새로운 길을 찾으려 애를 쓸까. 그리하여 저의 후손들이 맑고 푸른 이생에서 오래 머물도록 자기 몸 속의 기록을 바꿔버릴 것인가. 아니면 몹쓸 이 곳을 떠나 저생으로 얼른 가라고 우리가 병이라 하는 암 같은 것을 제 몸 속에 더 기록하여 넣을 것인가. 나로서는 아직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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