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혀 짧은 앵무새의 긴 독백 - 고찬규

마루안 2018. 8. 22. 19:12



혀 짧은 앵무새의 긴 독백 - 고찬규



너무도 명백하다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지
나 자신 믿지 않지만
세상에 나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드니
불확신은 불투명했고 늘 불안했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삶의 모서리에서 줄을 타고 있다
실핏줄 같은 가느다란 생의 곡예
더 큰 칼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가장 잘 드는 칼은 아주 작은 칼이었다
간혹, 근육과 펜 혹은 카메라도 무기로 사용되었다


밤이면 보았다 고독과 환멸의 찌꺼기를 날리며
도시의 검은 혈관을 따라
질주하는 화려한 피톨들을
그리고 나는 보았다 노을이 지는 밤
하늘을 찌를 듯한 십자가며
불빛을 향하는 발길들이 빨려드는 어둠을
종기처럼 솟은 빌딩들의 변주곡 안에서
나 역시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내 우리 모두는 똑같은 표정을 배우게 됐다
누구의 간섭도 필요 없다 그것은
가장 편리한 서로의 일상이다


나른한 어느 날
찬송가와 진혼곡을 구별하지 못한다
지하도 입구에서 들려오는 목탁 소리가
타일을 하나, 둘 떨어뜨릴 때
어떤 소리는 더 잘 들렸지만 대부분
나와는 거리가 먼
너무 큰 소리였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피는 몸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
뜨겁다고 느끼는 순간 차갑게 식어 버리는 것
때가 되면 흐르기를 멈추는 강과 바람은 무엇이 영글어가는 것을 보았을까


23.5도가 기울어져 있었지만
애당초 느끼지 못했던 것을
망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가장 높이 솟아 있는 것은 언제나 중심이 되었으며
그 끝은 하늘을 향하고 있다
더 높은 곳에 오르면 보였다 밤이면
스스로가 얼마나 많은 자신이 쏘아 대는 불빛과 경쟁하며 달리고 교차하는가를


내 몸에도 언젠가 체증이 일 것이다
꽃 피는 도시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은 없다, 단지
보일 뿐



*시집, 핑퐁핑퐁, 파란출판








천일야화 - 고찬규



밤마다
세헤라자데는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걸까


그녀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여 마침내
온몸으로 증명하려는 얘기는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가슴을 가리고 다리마저 친친 감고 있는데
가리는 만큼 드러내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을, 세상을 믿는다지만
믿음을 믿지 않는다는
지금
세상이 변한 건가 당신이 변한 건가


당신은 실망할 자격이 없다
당신이 믿음의 믿음을 생각할 때
그녀는 속삭인다, 끝내
끝나지 않을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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