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벼랑 - 신철규
마지막 연락선이 바다에 몸을 맡긴다
천천히
박음질을 하며 수평선을 향해 나아간다
꽁무니에 하얀 실밥이 풀려나온다
갈매기들이 머뭇거리다가 선착장으로 돌아간다
너무 멀리 가면
돌아올 곳을 잃어버린다
빛과 어둠이 만든 붉은 주름이 조금씩 뒷걸음친다
실핏줄이 돋아난 바다
비문처럼 떠 있는 바지선들
고물이 들썩거릴 때마다 흔들리는 당신의 속눈썹
등대의 불빛이 검은 수평선을 향해 뻗어간다
등대의 밑은 어둡다
섬 뒤에 숨은 또 하나의 섬
당신 속에 가라앉는 또 하나의 당신
뒤돌아선 당신의 뒷모습이 벼랑 같다
벼랑의 뿌리를 핥는 파도가 하얗게 부서진다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
서로 밀어내며 좀더 짙어졌을 뿐,
속눈썹 위에 걸려 있는 말들이 파르르 떨린다
반환점을 돌 때 우리는 잠시 포개졌다가 다시 멀어진다
어두운 객석에 마지막까지 남은 관객처럼
우리는 두 손을 마주잡는다
우리가 실밥 같은 웃음을 주고받을 때
등뒤로 먹구름들이 꿈틀대며 서로 몸을 비빈다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문학동네
유빙 - 신철규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 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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