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골 위에 단애를 세워두고 - 조유리
씻김굿 하는 저 꽃
죽은 꽃잎들이 산 이름을 부르는구나
우리 오래전 태어나
살빛을 익혔지
핏내 빚어 화전을 부쳤지
너에게서 흘러나온 표정이 내 입술에서 피어날 때
두근거리는 맥박이 허공에도 맺혔지
바람 부는 방향대로 무작정 휘었지
입꼬리의 흰빛이 길어졌다 짧아졌다 낮밤 없이 분분할 때
죽은 사향나비의 체액
입김을 후 불 때마다 세상 모든 꽃에서
사람의 냄새가 풍겼지
사람도 꽃으로 살다 간다며 피고 지는 때
쇄골 위에 단애(斷崖)를 세워두고
여기서부터 우리 다른 세상 얼굴이 되자
눈코입 벗어버리고 가장 연한 살로만
수의를 입은 눈으로 만져보면 부드럽게
천지 깜깜해도 무섭거나 흉하지 않게
성성한 죽음의 안감이 되어
초사흘 달을 지르는 작두날이 붉구나
몸 바꾸는 피 조용해진다, 저 산딸꽃
*시집, 흰 그늘 속 검은 잠, 시산맥사
염 - 조유리
-닭이 세 번 울어주었으니, 이제 우리는 지상에서 가장 먼 변방이 되어
멀리서 두근거리던 오월의 태(胎)를 자르고 태어났으나
계절의 저쪽에서 보면
삶과 죽음의 국경을 몸 이편저편에 아로새기는 일이다
케이크의 촛불이 함께 살았던 경계를 지난다
사라지는 어둠 속
꽃등을 켜 든 영정이
양 갈래 리본을 메고 환하게 웃고 있다
떠난 화환들이 방명록에 쌓이고
어서 촛불을 불어 끄라고 흰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자들이
손뼉을 치며 노래 부르는 동안
다 자란 초들이
망자의 시간으로 내려온다
흘러내리는 촛농은
내 가장 연한 살에 닿아 떨던 맥박
조금씩 녹아 맺힌 것들이 한 생을 이룰 때
첫날밤이 태어난 자리에 맨 마지막 숨을
삼베 끈으로 동여매 놓고 주소지를 옮기는
우리는 서로의 가장 머나먼 장지(葬地)다
살아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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