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정선 장날 - 나호열

마루안 2019. 4. 21. 19:08



정선 장날 - 나호열



이제는 늙어 헤어지는 일도 섭섭하지 않은 나이
사고 싶은 것도 없고 팔아야 할 것도 없는 장터 이쯤에서
산이 높아 일찍 노을 떨구는
잊어버린 옛사랑을 문득 마주친다면
한 번 놓치고 오래 기다려야 하는 버스를 기다리며
낯익은 얼굴들 묵묵부답인 저 표정을 배울 수 있을까
알아도 소용없고 이름 몰라도 뻔히 속 보이는
강물을 닮은 얼굴들이 휘영청 보름달로 떠서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는 아라리로
누구의 가슴을 동여매려 하는가
함부로 약속을 하지 말 일이다
다음 장날에 산나물이라도 팔 것이 있으면 오고
살 물건이 없으면 오지 않을 것이다
문득 피어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질 때 더욱 보고 싶어지는 그런 꽃처럼



*시집, 타인의 슬픔, 연인M&B








커피에 대하여 - 나호열



사랑을 믿지만
과녁에 꽂히는 화살처럼
가슴에 적중하는 사랑이 나는 두렵네
오늘 밤 뜨겁게 일렁이는 사랑이 지나간 후
속삭이는 바람을 잊어버리기는 너무 힘드네
조금씩 오조준하여 빗나가는,
그리하여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오해받을지라도
나는 그대의 심장 옆에 머물고 싶네
오십 년 만에 이제 겨우 커피 맛을 알게 되었네
향이 좋은가? 그 씁쓸함이 좋은가?
설탕도 넣고 크림도 넣고 커피도 넣고
그래도 그것들의 섞이지 않는 단단한 고집을 이해한다네
나의 외로움을, 쓸쓸함을, 허망함을 사랑하는 사람이여
외로움을 벗은, 쓸쓸함을 벗은, 허망함을 벗은
앙상한 정신은 매력적인가
이 시커먼 속은 무엇으로 감출 수 있는가






# 언젠가부터 쓴 맛에 거부감이 줄었다. 가리지 않고 마시던 커피도 설탕 없는 커피가 좋아졌다.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던 쌉싸름한 나물에 젓가락이 가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는 중년이다. 쓴 맛을 알면서 뭔가를 자꾸 흘리는 나이, 그래서 중년은 더러운 것인가. 내 인생은 더 써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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