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비 - 류시화

마루안 2019. 4. 19. 19:30



나비 - 류시화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지구에 달맞이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이제 막 동그라미를 그려 낸
어린 해바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내가 삶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그리움 때문
지구가 나비 한 마리를 감추고 있듯이
세상이 내게서
너를 감추고 있기 때문


파도가 바다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장난치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모래에 고개를 묻고 한 치 앞의 생을 꿈꾸는
늙은 해오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너는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나비의 그 날개짓 때문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내 그리움 때문



*시선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열림원
*원본은 시집, 외눈박이 물고기 사랑








그만의 것 - 류시화



외딴집에 홀로 사는 남자
침묵은 그의 것
오후의 나른함과 권태는
그의 어깨죽지에서 피어오르고
한두 시간쯤 시간을 내어 그가 산책하는 길에는
잎사귀가 넓은 붉은 꽃들이 피어 있다
붉은 꽃들


그의 그림자는 그의 것
반항하지 않으며
그가 좋아하는 엉겅퀴풀들
엉켜 있는 뿌리들
시간의 얼룩들 위를 지나


우리는 가끔 마주치기도 하는 남자
태양은 등 뒤에서
그의 뇌를 미지근하게 부풀린다
둥글고 딱딱한 것
열에 들뜬 열매들
좁고 가파른 돌길을 걸어내려와
우리가 한쪽으로 비켜섰을 때
우리 발앞을 지나쳐간 남자


그의 시간은
그만의 것
그가 꿈꾸는 것과 위험한 생각들도
그만의 것


그가 비탈을 걸어 내려갈 때
그의 발이 굴러 떨어뜨리는 흙은
비탈에게 한 세계를 준다


그는 왜 모자를 썼을까
왜 모자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을까
그는 살아가는 일보다 꿈꾸는 일이 더 두렵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는 홀로 사는 남자
이따금 한 번도 내려가 보지 않은
강 아래쪽 풍경과
한 낮의 수증기와
구름들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오후에 한두 시간쯤 시간을 내어 그는
어느 곳에 이른다


그의 삶은 그의 것
그가 이르는 곳에는 그만이 서 있다
꽃들의 그림자
그림자가 감추고 있는 그림자
산책하는 이들의 발길을 비웃는
비탈길에서 그는 미끄러진다
미끄러져 내린다


우리가 걷는 강 아래쪽으로 떠 내려온 남자
죽음은 그의 것
햋빛을 피해 얼굴을 물 속에 처박고
뒤통수에 앉아 있는 검은 물잠자리도
그의 것
이미 그는 알 수 없는 곳에 가 있고
알 수 없는 그만의 것에
이끌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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