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설레는 피안 - 김연종

마루안 2019. 4. 19. 19:23



설레는 피안 - 김연종



가벼워야 날 수 있다
뼛속까지 비워야 한다
항암의 캡슐마저 거부한 채
탕약 찌꺼기 같은 유방을 끝끝내 도려내지 않고
치렁치렁한 암세포를 봉분처럼 모시고 사는
새 한 마리
동그랗게 말린 등뼈를 퍼덕이고 있다


가벼워야 건널 수 있다
아직도 더 비워야 한다
등뼈 곧은 자들은 레테의 강을 건널 수 없다며
찌부러진 生의 좌표를 뽕브라 속에 감추고
불치(不治)의 배 속을 또 비우고 있는
새 한 마리
달라붙은 등가죽을 토닥이고 있다


피안을 위해서는
날개가 필요하다



*시집, 청진기 가라사대, 천년의시작








똥의 생성에 관한 경험론적 고찰 - 김연종



봄똥이나 싸 먹자고 했다 순한 삼겹살에 풋풋한 된장쯤이라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배추 푸성귀를 내놓았다 푸르스름한 이파리에 동그랗게 몸을 만 배추벌레가 빈 접시를 갉아 먹고 있었다


애기똥풀처럼 노란 멍게를 초고추장에 찍는다 건배를 외치며 마른안주를 주문한다 똥꼬 치마를 입은 포장마차 아가씨가 눈만 말똥거리다가 바다처럼 풍성한 접시를 내준다


접시에는 배가 통통한 멸치들로 가득하다 멸치 똥과 대가리를 빼고 남은 등뼈를 고추장에 찍는다 바다 냄새 진한 멸치를 씹으며 똥의 생성에 대해 생각한다


푸른 바다를 삼켜 똥을 만들어 내는 저 위대(胃大)한 바다의 내장을






# 김연종 시인은 1962년 광주 출생으로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2004년 <문학과 경계>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극락강역>, <히스테리증 히포크라테스>, <청진기 가라사대>가 있다. 의정부에 있는 김연종 내과 원장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류장에서 작아지다 - 류정환  (0) 2019.04.21
나비 - 류시화  (0) 2019.04.19
봄날 열흘 - 김종해  (0) 2019.04.18
조화 - 안성덕  (0) 2019.04.18
꽃이 질 때 - 성백술  (0) 2019.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