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떨림 - 배용제

마루안 2019. 3. 22. 19:26



떨림 - 배용제



버드나무에서 새 한 마리 날아오르자
나뭇가지가 파르르 떨린다
일순 허공의 세계가 잠시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다


제 몸 깊숙이  떨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나무는 천천히 어두워지고 있다


어쩌면 버드나무는 평생
사소한 바람소리에도 아득히 정신을 놓으며
떠나간 새의 안부를 물을 것이다
속울음 같은 떨림을 끌어안고
오래오래 제 속을 비워갈 저 버드나무
자신의 영혼이 펼칠 수 있는 마지막 날개 같은 것이어서


떨림이란 또 다른 너의 얼룩 같은 것이어서
없는 너를 품는 것이 얼마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지


내 가슴속 오래 멈추지 않는 울렁증,
어느 상한 마음이 머물다 떠나간 흔적일까
또 다시 허공 속 수만의 길을 향해  안부를 묻는다
바람 한 줌이 들여다보는 빈자리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그림자만 버려져 있다


내 것이 아닌 나를 내가 사용하는 것 같은 죄스러움에
길바닥에 우두커니 세워두지만
어느새 어두운 내 속으로 따라와 웅크린 채


버드나무와 나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잎이 지거나 완전히 늙어버릴 때까지
서로의 떨림을 견주어본다
날 수 없는 날개를 품는 것이 어찌 보면 너무 막막함이라서



*배용제 시집, 다정, 문학과지성








바람의 내부 - 배용제



믿지 않겠지만,
나는 바람의 몸을 애무해본 적이 있다


멀리 몇 채의 구름이 날카로운 신음소리를 내며 지나갔고
쓰디쓴 체액들이 게워졌다
나는 한 방울의 정액처럼 바람의 내부로 흘러갔다
꽃들은 여전히 고통스러웠고
수만 년 동안 모든 짐승의 울음소리를 기억하는 자세로 피어났다


꿈마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 은밀하게 바람의 뿌리를 더듬고 있었다


믿지 않겠지만, 내 혀 속에 바람의 씨앗들이 잉태되었다
그때부터 날마다 붉은 피의 밑그림을 그리는
구름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바람들은 가끔 사람의 몸으로 떠돌았다


언젠가 공원의 외진 벤치에서 흐느끼는 사내를 본 적이 있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울음을 껴안고 소용돌이치던
그 사내의 등은
어느 바람이 흘리고 간 내부일 뿐이어서,
고대의 노을이란 주소지를 기록하지 않고는
그곳에 당도할 방법이란 없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길 하나를 붙들고 밤새 울던 바람을 본 적이 있다
외부에서 내부로
내부에서 외부로
사라진 것들 모두 꽃길을 통과했던 것처럼
사라진 것들의 연대기를 전부 기억하려는 것인지
꽃들은 버려진 발자국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미 사라진 길의 전설과 바람은 한 몸이 된 지 오래,
꽃이라는 고통의 빛깔과
길 위에서 희미해지고 아득해진 것들의 안부를 묻는


어떤 사람들은 가끔 바람의 몸으로 떠돌기도 했다






# 세상 곳곳에 시인들이 쏟아져 나오는 마당에 시 또한 모래알처럼 많다. 이런 때일수록 좋은 시를 찾아 읽는 안목이 필요하다. 많은 시를 읽기보다 좋은 시를 여러 번 읽는 것, 배용제 시는 자주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위 두 시 또한 읽을 때마다 떨림을 준다. 내 맘대로 시집에 실린 대표작으로 단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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