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에서 불편하게 살다 - 이은심
늘 폐업세일이다
두드리면 열린다는 믿음을 카드인식기에 밀어 넣고
느리게 다가오는 죽음의 이미지에 바코드를 붙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고
몰라도 될 것들은 더 잘 외워지는데
선반 하나가 공연히 망가진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한다는 주의사항을 정독한다
추락주의와 추락 주의에 한 발씩 걸친 생필품들은
반사경 속에 살림을 차리고 오래 살 궁리 중
이 오지에서 소나기 다녀갈 때 라면을 끓이면 가슴이 먼저 졸아든다
진열장의 물건들이 곰팡이를 피우는 이유는 열 가지도 넘는다
나는 전보다 더 잘 웃지만
웃어도 우는 것처럼 보인다고
단골들이 등을 돌려 건너편 가게로 간다
일당에 울고 웃는 생의 막일꾼
젤리처럼 줄줄이 엮인 나 자신을 헐값에 처분하고 짬짬이 짜다 만
손익의 거미줄을 토해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
현재 시각 가을
느리고 긴 짝사랑의 셔터를 내려야 할 시간이다
*시집, 바닥의 권력, 황금알
급소 - 이은심
올가미를 들고 다가오는 당신은
내가 덮고 잔 설원의 긴 이름
말 잔등에 엎드린 올가미는 망설인다
풀을 먹는 나와
나를 먹는 초원의 관습은 오랫동안 아파 왔으므로
당신의 일주일치 허기는 내 뿔에 걸린다
울부짖는 불안의 굴레에 흰 목책을 둘러주던
당신이 겨냥하는 급소는 부르면 달려가는 나의 사랑
발톱 끝까지 아픈 필생이
바람의 핏발 선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우리 사이엔 단지 생존이 있을 뿐
미안하다 고맙다
당신의 눈물에 맺히는 반칙을 목격한다면
마음이 바뀌기 전에 늪으로 가서
풀물 든 어금니를 정갈하게 닦고
당신의 백야를 살려 보낼 것이다
이 단칼의 내리침을
이 필사적 노여움을 당신의 가슴에 고요히 묻을 생각이다
# 이은심 시인은 1950년 대전 출생으로 한남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2003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오얏나무 아버지>, <바닥의 권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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