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에는 내가 없다 - 문무병
아, 거울 속에 내가 없다.
어디로 갔는가.
내가 이 세상을 분명 살았다 하는데
빛으로 증거할 수 없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오늘, 지금,
그대 앞에서 너무 부끄럽구나.
보이지 않는 내가
보일 수 없는 내가
내 말로 다할 수 없었던 사랑이,
실로 '허망하다'는 느낌이,
거울 안 어둠 넘어 어둠의 깊은
어둠 속에 없다는 것을 각인하는
행복하지 않은 사랑이,
진정 행복이라고
부끄럽지만 그대 앞에 서서
이야기하고 싶구나.
시간을 비추는 거울 속에는
내가 없어요.
내가 없어요.
*시집, 11월엔 그냥 젖고 싶어, 도서출판 각
11월엔 그냥 젖고 싶어 - 문무병
늦은 가을
꿈도 바람맞은 날.
아침에 찬비 내렸고. 그녀에게서
저녁에 만나자던 기별이 왔다.
정말 빠르게 하루가 가는 운 좋은 날이었다.
바람 타는 그녀와 만나면
바람아 어쩌지 하며,
곶자왈 오름 밭 억새 숲길 걸으며
11월은 그냥 조용히 젖고 싶다.
산 억새는
종교처럼 그윽하게 바람에 흔들리고
올 가을은 바람아,
내 코트 깃에 묻은, 감성의 시편들,
당신과 함께한 세월의 낙서,
지워지지 않는 낭망의 바이러스
11월은 비에 젖어 그냥 가게 내버려두렴.
바람을 만나면 바람에 불리고
비를 만나면 비에 젖으며
떨리는 마음 그냥 버려두게.
그대를 닮은 '낭그늘'의 연인이여.
오늘은 연서를 받고 가슴 떨리는
바람에게 전한 말, 청춘의 날들을 헤며
당신께 다시 쓰는 연서처럼 비는 내리고,
올해도 꿈 근처를 서성거리며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전할 수 없는 수천 겁 어둠 쌓여 있으니
아, 바람이여
11월 밤 빗속을 당신과 함께 젖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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