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여가수 - 김승강
저 늙은 여가수는 어쩌자고 돌아와서 목쉰 노래를 부르는가
사랑하노라 노래하는 늙은 여가수 그때는 사랑을 몰랐노라
눈가에 눈물 고인다
저 늙은 여가수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어야 했다
사랑 따라 떠났다
사랑이 떠났어도
늙은 여가수 말매미 목청껏 울어대는 이 여름날에는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매미 허물처럼 노래는 남겨두고
떠나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떠나가서 별이 되었어야 했다.
어쩌자고 간신히 잊힌 사랑 노래가 이제 와서 다 늦은 이 저녁을 붉게 물들이는가
*시집, 기타치는 노인처럼, 문예중앙
백년여인숙 - 김승강
기차가 도착했다.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가 탔다. 기차는 기적도 없이 떠났다. 나는 어젯밤에 이 여인숙에 투숙했다. 동행이 있다. 여자다. 지난밤을 함께 지냈다. 우리는 어젯밤에 이 역에 내렸다. 우리 둘 외에 내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여인숙에 투숙한 것은 순전히 내 생각이었다. 그는 내 생각을 말없이 따라주었다. 나는 이 여인숙에 백년 전에 투숙한 적이 있다. 이 역에 내린 이유와 이 여인숙에 투숙하게 된 이유는 순전히 그것 때문이었다. 백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이 여인숙은 백 년 전 그대로다. 주인 여자도 늙지 않고 그대로다. 주인 여자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조금 섭섭했지만 곧 이해했다. 그 때문에 주인 여자는 늙지 않았을 것이다. 여인숙 마당 백일홍도 백 년 전 그 여름날처럼 붉다. 나는 어젯밤을 함께 지낸 내 옆의 여자에 대해 생각한다. 그가 처음으로 낯설다. 그는 왜 이 역에 내렸고 나를 따라 이 여인숙에 함께 투숙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는 어젯밤 함께 울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다. (기차가 온다.) 그는 아직 잠들어 있다. 기찻길 옆 오두막집 딸처럼 잘도 잔다. 나는 그를 두고 혼자 떠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기차가 지나갔다.) 누가 화장실에 갔다 오는지 화장실 냄새가 내 방까지 밀려온다. 나는 잠든 그를 기다리기로 하고 벽의 낙서를 읽는다. 백 년 전에 쓴 낙서들이다: 동림 사랑해 영원히 1986/12/23; 승강과 미경 여기서 하룻밤을 묵다 1993/6/19. (그러나 나는 이번에는 아무 기록도 남길 수 없다.) 나는 속옷차림으로 쪽마루에 나와 앉았다.문득 기차 시간이 궁금하다. 나는 습관적으로 왼쪽 가슴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티켓을 끊어두었던가, 하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다. 백 년 전에도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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