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잎의 이사 - 서상만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
한 이태 머물다 가기로 했다
낡은 아파트지만, 오후까지 따스한 햇살이
오롯이 젖어드는 서남향 집
된장독을 안고 다니는
아내의 눈빛이 행복해 보여
떠돌이 마음도 한숨 놓인다
이제는 적당히 맞춰 사는데 이력이 생겨
누구에게도 굳이 고백할 것이 없다
드디어 우리는 만추의
가랑잎,
어둠이 우리를 이리저리 끌고 다녀
어느 벽지에 밀려도 잘
바람 타며 구른다
구름이 어떻게 흘러도 이제
우리는 다시 푸르게 젖지 않을 것이기에
*시집, 시간의 사금파리, 시학
그 자리 - 서상만
-나의 자화상
이 빈방에서
그는 무슨 꿈을 꾸고 떠났을까
아직도 촛농 녹아내린 빈 유리병에
고인 눈물 소리 난다
꿈속에 그는
얼굴을 숙인 채
손으로 오라는 벙어리 시늉만 한다
가까이 가보니
투명한 유리관에 갇혀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안경을 쓰고
해맑은 얼굴에 잔주름을 묻고
좀 까다로운 인상을 주면서
생활에는 실패했다면서
가슴은 눈물만큼 더 많이 젖어
자주자주 마취주사를 맞으면서
낡은 몸을 꿰맨다고 수하한다
시간의 모래톱에
나를 끌고 더듬던 넋, 이
시멘트벽에 가려 누워 있는 오목렌즈 안의
서러운 눈알로는
그리운 바닷가도, 눈부신
하늘의 별도 볼 수 없는 나의 도피?
나도 바람처럼 살다가야 하나
나의 빛바랜 초상화, 자주 뒤적거린 사서집주(四書集註)며
사기(史記), 유사(遺事), 시첩(詩帖)들의
낡은 흔적들 가슴에 묻고
나는 먼 천년에 바쳐질 바람이 되어
굴러간다, 어딘가
끝이 있을 것 같아서
또 꿈속에 울고 간, 허상의 검은 그림자
나에게로 돌아가는 길
그 빈방의 외로운 주인으로
소리 죽여 속삭인다
아직도 바닥 없는, 방황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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