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제 간신히 저녁 - 임후남

마루안 2018. 10. 29. 22:20



이제 간신히 저녁 - 임후남



소나기인 줄 알았더니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다
함부로 달려드는 바람,
나뭇잎들이 부대끼느라
숲이 시끄럽다
커다란 나무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잔가지들만 요란하다


너의 집 뒷산에서 만난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와 오가피나무 들에게
저 바람이 왔느냐고
전화를 할까,
문자를 보낼까


그러나 지금은
내가 함부로 생生에 달려들 때가 아니므로
쪼그리고 앉아 바람을 솎아낸다
밤이 오기 전까지 얼마나 더 요란할까
이제 간신히 저녁,



*시집, 내 몸에 길 하나 생긴 후, 북인








산밤 - 임후남



아버지는 가난했다
가난한 아버지는 가을이면
산밤을 주워왔다
이게 쪼그맣고 볼품없어도 맛은 얼마나 있는데,
나는 아버지가 삶아준 산밤을 먹지 않았다
나는 큰 밤이 좋았다


기술이 없던 아버지는 막일을 했다
벽돌을 나르거나 삽질을 하거나
그러다 더 늙어졌을 땐 공사장 쓰레기를 치웠다
때때로 십장은 아버지에게 돈을 주지 않고 사라졌고
아버지는 치욕과 분노를 발끝으로 채면서
서울 남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걷거나
혹은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오래 걸었다
차비 몇 푼밖에 아낄 수 없었던 아버지가
막걸리에 취해 빈손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대거리를 했다
참 못난 아버지였다 그 시절에는


큰 밤 같은 길을 찾아 남쪽으로, 혹은 북쪽으로
나는 오래도록 걸었다 큰 대문 앞에 서서
십장 같은 사람을 만나면 절로 고개를 숙이면서
그 집으로 들어가고 싶어 몸을 배배 꼬았다
어쩌다 누가 내게 좋은 신발을 신겨주었을 때는
나는 또 누군가에게 십장 같은 노릇을 해야 했는데ㅔ


이제 가을 산에 올라 산밤을 줍는다
아버지가 산길에서 주운
이 쪼그맣고 볼품없는 산밤이 맛있어서
조금씩 아껴 먹는다 못난 내게
참 순한 아버지가 지금에야 온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독의 근육 - 류근  (0) 2018.10.29
무연고의 탄생 - 한승엽  (0) 2018.10.29
해가 떨어진 길에서 나는 - 박수서  (0) 2018.10.29
바닥, 밑바닥 - 권수진  (0) 2018.10.28
악연 - 박철  (0) 2018.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