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떨어진 길에서 나는 - 박수서
뱀이 오줌을 지린 것 같은 길, 벗어버린 허물처럼 한물간 꽃무리에 앉아 세월을 파네 날아가버린 청춘의 치맛자락에 고드름처럼 얼어버린 억장도 내다 팔 수 있다면, 깨지고 부서지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으련만
아, 가을이 물고 오는 노을의 비린내
지긋지긋한 밤과 꽃처럼 알싸한 청춘의 낮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러면 안 된다며 호통 치는 세상에게
옜다, 소처럼 푸성귀나 먹고 얌전히 살겠다고
보도블록 위 화단 꽃배추 씻어 상에 올리고, 내 살을 떼어 고기로 내어놓으니
이 저녁 길거리 제단은 봐라, 고기 익는 연기 자욱하다
*시집, 해물짬뽕 집, 달아실
낙엽 - 박수서
얼마 남지 않은 몇 잎이 끝끝내 붙들고 있는 것은, 다 발라 먹고 남은 조기의 끈덕지게 붙어있는 살점 같은 당최 떨어질 줄 모르는 가을날의 미련일지라
낙엽을 밟는 일은 퍽 낭만적인 것만은 아냐
낙엽 밟는 소리는 어린 날 소보로 빵 봉지를 뜯는 소리 같아
그래서 추억은 대개 허기진 거야
저것 봐라, 한 입만 베어 먹으라 했더니 잎 참 크게 벌렸구나
얼마나 많이 먹었으면 저기 달똥 떨어진다
검은 하늘에 붉은 낚시줄을 긋는다
지상으로 떨어지며 이 밤 촛불이 되겠지
# 가을이 익을 대로 익은 요즘과 딱 어울리는 시다. 음식도 제철 음식이 맛이 있듯 시도 적절한 시기에 읽으면 입에 착 달라 붙으면서 제대로 맛을 느낄 수 있다. 음식에 비유한 적절한 싯구가 더욱 시를 맛있게 한다. 이런 시쯤 과식하면 어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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