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 - 박소란
소도시 원룸의 아버지는 요 며칠 부쩍 꿈자리가 사납다고
일장춘몽이라 했느니, 딸아
모쪼록 너는 안녕히 잘 지내거라
언제부턴가 세상의 모든 인사는 작별 인사
수화기 저편 아버지는
무거운 이불 속으로 더 무거운 몸을 끌어다 묻는다
그 곁에 붉은 흙냄새를 풍기는 잠이 별안간 찾아들 것이다
오늘 나는 수첩 한 페이지를 열어 때늦은 유언을 적는다
만원버스 구석에 앉아 졸음을 토할 때나 허겁지겁 숟가락을 들 때
사랑을 나눌 때조차 늘 가방 한쪽에 숨죽이고 있을 유언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그만 기민한 어제가 된다
처음이자 마지막 봄볕이 성에 낀 창가를 잠시 두리번거리다 멀어진다
일장춘몽이라 했느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안녕하지만은 못했던 날들이
구태여 잠잠히 흘러간다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창비
통속적 하루 - 박소란
전화를 걸지 못했다
9층 사무실 창으로 내려다본 바깥 풍경이 탄식하듯 저무는
이 저녁의 낙막을 나는 그저 방관하기로 한다
눈 주는 곳마다 노을은 무너지고 순하던 잎사귀 화염처럼 치솟아
죄는 깊어가는데 사랑의 죄 사랑할 수 없는
한그루 은행나무
제 바로 곁에 병든 짝을 세워둔 저 맹목한 사내를
뿌리째 흔든다 한들 우리 계절은 너무나 뻔하고 뻔한 것이어서 결국
구린 열매 몇알 빈 가슴을 탕진하고 말 뿐
거리는 온통 멀어지는 뒷모습들로 가득해
누구든 어디든 붙잡고만 싶어
퇴근을 놓치고 선 하늘의 망연한 얼굴만 들여다 볼 때
이대로 잠시 앓기로 한다
단지 오늘만, 끝으로
보고 싶다 한마디가 몰고 온 이 하루의 고약한 병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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