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허수아비 디자이너 - 이현승

마루안 2018. 9. 17. 19:27



허수아비 디자이너 - 이현승



내가 하는 일이란
허수아비 디자이너 같은 일이다.
참새들에게 깜짝 놀랄 아침을 선물하기 위하여
밤의 공책을 메꾸지만 그건 사실 세상 밖의 일이고
무엇보다 참새들에게 허수아비는 비호감이다.


선택에 대한 포기의 비용을 기회비용이라고 하고
그것은 장사꾼에게 이문이 남지 않는 일을 하느니
돈놀이를 하는 편이 낫다는 뜻이지만


철수가 미자 대신 순자를 사랑해서
순자를 선택하고 미자를 포기해서 얻는
이익이란 이익의 관점일 뿐이다.
삶이란 언제나 선택의 편에서 포기를 합리화하는 일이므로
계산 자체에도 막대한 비용이 든다.


미자에게 맞은 딱지는 언제라도 뼈아플 뿐이고
순자가 미자보다 예쁘다는 말처럼 멍청한 말은 없다.
그러므로 허수아비 디자이너의 급여가
얼마인지를 묻는 당신의 신념과는 다르게
나는 어쩐지 오늘 참새들의 표정이 마음에 걸린다.


참새들은 내게 맡겨라.
참새들이 허수아비를 보고 놀라기는커녕
공들인 옷에 똥칠이나 한다고 비웃지 마라.
허수아비 어깨와 팔에서 쉬도록 하여
참새들을 편안함으로 가두는 것도 넓게 보면 큰 이문이다.
참새야 너무 무서워는 말고 조금 무섭게
너무 친하지는 말고 조금 멀리,
그렇게 같이 살자.



*시집, 생활이라는 생각, 창비








코뿔소 - 이현승



노안이 왔나보다.
일생 근시안으로 살아왔는데
가까운 것도 먼 것도 보이는 않는 건
다초점 렌즈가 답이라고 치고,
어린 딸들을 재우다 본 멍투성이의 다리는?
멍든 다리를 쓸어보려다 오리무중이다.


문제는 많은데 답은 하나인지
문제는 하난데 답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 질문이 뭐였는지
답이 안 나오는 삶이다.


여전히 우리는 돌아올 만큼만 떠나고
떠나온 만큼만 굽어보지만
불행한 사람에게 물어보는 안부처럼
여전히 삶은 노골적으로 상스럽지만


형식은 궁리인데, 내용은 기도가 되는
피차 빤하고 짠하기만 하는 삶,
미친 여자가 꽃으로 자기를 꾸미는 것이
나에게는 어떤 암시처럼 보인다.


코뿔소는 시력이 나쁘다.





# 참 절묘한 표현이라고 무릎을 치면서 읽는다. 이현승 시인은 나름 자기 만의 색깔을 갖고 있는 시를 쓴다. 시도 자기가 좋아 쓰는 것이고 읽는 나도 내가 좋아 시를 읽지만 이렇게 궁합이 맞는 시를 만나면 반갑기 그지 없다. 문맹이 아님이 감사할 따름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동으로 오는 가을 - 고재종  (0) 2018.09.18
야생화 병(病) - 최서림  (0) 2018.09.18
여름 이후 - 이종형  (0) 2018.09.17
코스모스 만발하여라 - 박수서  (0) 2018.09.17
가을의 기도 - 김남호   (0) 2018.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