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 백무산
한 남자가 저와 꼭 닮은
아이 하나 안고 왔는데
자세히 찬찬하게 주의깊게 들여다보니
닮은 것 이상이다 아비보다 더 아비답게 생겼다
아하, 아이가 원본이다
시간은 꼭 아비에게서 아이에게로
흐른다는 생각은 일종의 관습
화석에서 자주 미래가 발견되기도 한다
종종 미래를 표절하기도 한다
아직 제본되지 않아 낱장으로 떠도는
미래가 불쑥 면을 바꾸기도 한다
돌연변이란 미래의 표절이다
간혹 광장에서 미래의 표절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걸, 도둑처럼,이라고 말한다
깨어 있으라,
과열된 꿈 때문만은 아니다
*시집, 거대한 일상, 창비
몸살 - 백무산
장마 닥치기 전에 끝장을 보자고 미련 떨었다
몸살약도 미리 먹고 코 막고 곰국도 먹고
밤잠 잊고 약속 잊고 끝을 보긴 봤는데
과다적재에 과부하다 관절이 열받아 들러붙을 참이다
근육이 영 식지 않을 작정이다
그냥 두었으면 고장날 퓨즈
사나흘이면 갈아끼웠을 걸 몇달 고생했다
그래서 몸살 몇봉지 내 몸에 슬쩍 끼워
요길할 때 쓰라고 주셨나보다
처방전을 잘못 읽었나보다
그대를 보내고 생각하니
세찬 여울물 흘려보내고 찾아온 고요가 들뜬다
무엇에 들린 게 분명할 터
눈치없이 끓어넘친 늦은 열정이 수상하다
되짚으니 그게 병이었나
내 생의 한 철 빙하기엔
피가 얼어버리지 말라고 발열 스팀을 넣은 몸살이었나
요긴하게 쓰라고 주신 약이었나
이리 귀한 몸 어디 쓰시려나
# 백무산 시인은 1955년 경북 영천 출생으로 1984년 민중시 1집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인간의 시간>, <길은 광야의 것이다>, <초심>, <길 밖의 길>, <거대한 일상>, <그 모든 가장자리>, <폐허를 인양하다> 등이 있다. 이산문학상,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백석문학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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