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노을 속에 잠기다 - 배용제

마루안 2018. 11. 29. 19:43



노을 속에 잠기다 - 배용제



파장동 횡단보도에 서 있는 저물녘
어쩌면 나는
유린당한 착란의 풍경
불이 꺼진 유리창 속에서만 어른거린다.
내 눈동자 속에서 한 무리의 새 떼가 솟구친다
이마에서 흘러나온 붉은 타르 같은 칠로 덕지덕지 번져가는 허공
벌써 뼈를 이룬 것들은 대지에 우뚝 검게 서고
모든 빛은 나의 내부로 들어와 죽는다


나는 어쩌면 유리창에 낀 먼지의 얼룩
머리칼을 쓸어 올린다
이면지처럼 창백한 여자의 얼굴을 지나
구멍가게 시멘트 벽의 부서지는 모서리를 지나
불붙는 문들과 화려한 구멍들을 지나
돌아보면 도시는 모래의 유적
돌이켜보면 나는
저 아득한 古生代 노을 속을 떠돌다
잠을 잘 때만 부스럭거리며 내 정체를 드러냈었지


나는 모래의 태반에서 기어나온 몸
어쩌면, 정말 어쩌면
몇 번인가 뒤집힌 지층의 풍경, 불붙은 모래 먼지의 착란
속에서 한 어여쁜 아이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노을 속에 잠기다 잠깐 뒤돌아보면



*시집, 다정, 문학과지성








부레옥잠 - 배용제



제 몸속에 가둔 바람 한 움큼으로도 지탱할 수 있는 생이 있다
뿌리를 갖고도 평생 떠다니는 몸들


옹기에 띄워둔 부레옥잠이 꽃을 피웠다
그저 고요한 수면 위 바람을 품고 떠있는 것이라 여겼는데
흰 꽃, 이파리들 속에 퍼렇다 못해 자줏빛으로 멍든 꽃잎 하나
그 멍, 한가운데 점처럼 박힌 달
저 달을 잉태하기까지 가슴에 품은 바람의 독기는 오래 싱싱하게 윤기가 흘렀을까, 알몸의 뿌리를 드러냈을까


다섯 살 이후 내가 품은 것들은 모두 바람이었고 病이었다
그것들이 등짝에 뿌리를 내리는지 자주 앓아 누웠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탕에선
병의 뿌리조차 허우적거렸다
그때마다 가슴에서 차갑거나 뜨거운 것들이 가슴에서 울컥울컥 솟구쳤다
간혹 달 같은 누런 알약들이 손바닥 위에 떠 있었다


그러나 내 슬픔은 고요했고
유리창에 고인 날들은 늘 잠잠했다


부레, 그것은 멍든 바람의 씨앗과 病을 매단 것들의 유일한 이름이었다
그 이름으로 날마다 눈물의 바탕에 뿌리를 내리고도 한생을 고요하게 떠돌 수 있으니
식물의 날들은 언제나 윤기가 흐르고,
꽃이 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