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독거노인 - 정일남

마루안 2018. 11. 12. 18:47



독거노인 - 정일남



그는 공원 벤치에 나와 앉았다
은행잎이 포위망을 좁히듯 앞뒤에 쌓인다


저기 임대 빌라를 돌아 여기 공원으로 찾아오는 또 다른 고독이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온다
고독과 고독이 만나 인사를 건넨다


햇살이 반사하는 벤치에
지팡이도 노쇠한 지금
은행잎이 비로소 은행잎으로 보인다
조락을 견디지 못하면
가려움이 온몸으로 번질 것 같다
두 고독이 황금색으로 변한다



*정일남 시집, 봄들에서, 푸른사상








가을이 있는 나라 - 정일남



북 치고 장구 치던 여름이었다
수해로 폐가를 남기고 여름은 떠났다


외나무다리를 건너 가을 여인들은 오는구나
단풍나무 그늘에서 또 만날 줄이야
옛날부터 전해오던 오곡백과의 나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찾아주니 너무 고맙군
열대우림국에는 한 번도 들르지 않고
북극곰의 나라에 여행한 적이 없었지
우리는 술잔을 놓고 힘들게 빚어낸 나무 열매를 다시 맛본다
우리가 단풍을 보지 않고 어찌
음객이나 명상가가 될 수 있겠는가


황금벌판을 달리는 기차를 타고
가을 나라로 여행을 떠나며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읊으며 사는 것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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