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장미가 준 바닥 - 황종권

마루안 2018. 10. 17. 22:27



장미가 준 바닥 - 황종권



바닥이 일제히 각을 세우자, 무릎이 예리하게 빛났다


무릎이 칼끝에 가까워지면
피를 쏟고 싶어 장미를 쥐었다
장미는 꺾이도록 아름다운 계단이었나
관절이 뜨거워질 때마다 가시가 뻗어나갔다


핏발 선 노을이 허기 가득한 비문을 새길 때까지
가시는 끝없이 뻗치고
당도할 곳이 없어 각을 세우는 바닥,
목을 겨누는 칼이었다가
부들거리는 계단이었다가
혼 빠진 오르간이었다가
죄다 가시덤불이 되고 있었다


검붉게 익어가는 저녁을 걸어보았다
헛것이 낭자한 구름이 백태가 낀 달빛이
가시덤불에 뒤엉키고 있었다. 가시덤불 따위
한낱 구겨진 종이 뭉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칼끝이 반짝였지만
무릎이 꺾인 저 가시덤불이 왠지,


장미가 준 바닥이었다



*시집, 당신의 등은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 천년의시작








짐승으로 - 황종권



당신의 바닥은 끝없이 배열된 건반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


악보 없이도 무덤에 가깝고
무덤 없이도 음악에 가까운 악기,
그것은 당신의 등이었다


발목이 부서지는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무언가를 전개하려고 할 때
상한 보도블록에 비가 쏟아졌다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다시, 구름이 되는 비
당신은 짐승이 털을 털며 허공을 견뎠다
눈보다 등을 미리 보는 일
다치지 않는 빛을 보듯이


물먹은 가로수가 그림자를 길게 뻗는 저녁,
젖은 머리칼 냄새를 맡으며 우리는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성한 곳도 없는 표정은
가보지 않아도 미리 알아버린 지도였으므로
가장 물기 없는 형식의 체벌이라 믿기로 했다


물속의 손금이 보였다 나뭇잎이었다 물결도 능선을 가지나,
사람의 등줄기에 잔주름을 긋는 폭우
바닥은 자신이 과녁인 양 활시위를 켰고
빗소리는 견디도록 엎드려 흘렀고,
우리는 짐승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 황종권 시인은 1984년 전남 여수 출생으로 순천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10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차세대 예술 인력에 선정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제18회 여수해양문학상 대상 수상과 2018년 아르코창작기금 수혜를 받았다. <당신의 등은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가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