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길을 걸었다, 아주 많이 - 박헌호

마루안 2018. 10. 15. 21:28



길을 걸었다, 아주 많이 - 박헌호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나는
사랑을 가문비나무에 맺힌 고통이라고 부르리라
책상 서랍에는
그토록 많은 30센티 대나무자가 쌓여 있었으니
그어진 눈금 위를 걷고 있는 내가 아직도 보인다
아니, 이건 무슨 물소리인가,
돌아보면 짙푸른 길들이 일제히 일어서는데
나는 점점 어두워지고
어둠이 만드는 바람,
어둠이 만드는 절벽,
어둠이 만드는 어둠
세월은 풀지 못한 숙취의 뒤끝처럼 어지럽고
눈금 위의 내가 보이지 않는다
그토록 오랜 시간의 저만치에서
나, 대나무자 만들어
책상 서랍에 간직해 두었으니
먼지 속에 뒹구는 내 이름은 보이지도 않는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나는
사랑을 칠판 위에 몰래 쓴 낙서라고 부르리라
그 많은 대나무자의 눈금 위에서
나는 또 다른 자를 흔들고 있었으니
내 발은 점점 부어오르고
오늘 안으로 집에 도착하지 못하리라



*시집, 내 가방 속 동물원, 문학의전당








길의 길 - 박헌호



철마슈퍼가 지나갔다 진달래 농원에 적재된
비료부대가 지나갔다 부흥회를 시작하는
부경교회 회색 십자가가 지나가고 대우정밀
정밀하지 못한 하오의 나사 같은 노동이 지나갔다
납땜 전문, 청둥오리 백숙, 구원의 집 150m 요양 전문
정원수 다량 보유, 빵꾸 전문, 추어탕 팜미다, 정장바지
세 벌 만 원, 세무 밍크 가죽 잠바 세탁 전문, 자전거
대여, 정화조 전문, 샷시 전문, 상인용품, 낚시
전문, 朴氏 喪中, 낙원 장의사, 지붕수리 전문
지나갔다


세상의 모든 길들이 길을 업고 지나갔을 때
팽이가 다시 돌았다






# 속칭 마이너 출판사에서 출판한 시집 중에서 뜻밖에 좋은 시집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대부분의 시인이 유명한 시집 전문 출판사에서 책을 내길 원하기에 지명도에서 밀리면 몇 년씩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천성이 조용하고 외딴 곳에 더 눈길이 가기에 이렇게 작은 출판사에서 좋은 시집을 발견하면 기분이 좋다. 내가 주변인으로 아웃사이더 기질이 다분하기에 더 그럴 것이다. 우울함이 묻어 있으나 야무지게 제 갈 길을 걷는 시인의 시선이 맘에 든다. 좋은 시는 숨어 있어도 언젠가 발견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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